자연·사람 공생하며 만들어가는 '풍경'
개발·재생 핑계로 일그러지고 있는…

창원의 풍경을 그리는 화가의 그림 속 창원은 어떤 모습일까?

그림에서 많이 그려지는 풍경(風景)의 사전적 의미는 바람風에 햇살景의 의미가 더해져 바람과 햇살로 만들어진 풍광을 의미한다. 그리고 풍광(風光)은 바람과 빛을 합친 말이다.

서양인들에게 풍경은 물적 대상이었다. 서구어에서 '풍경'을 나타내는 말이 'land', 'pays' 등인데, 이 말은 근대 이후의 도시화·공업화의 진행과 정반대로 상대적으로 인공적인 변화가 적고 또한 그 지방 각자의 특색을 띤 자연을 보여주는 풍경이 미적 관조의 대상으로서 인식되었다고 하는 역사적 사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역시 극동지역인 한국이나 중국, 일본의 산수화가 대상으로 하는 것과 같은 자연의 조망으로부터 풍경은 그려진 것이다.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에서 소개된 랜드스케이프(LANDSCAPE) 개념이 당시의 이상화된 풍경을 구성하는 것을 뜻하지만, 본래는 토지소유권이었다. 그리고 건축에서는 경관이라 하면 보통은 현대 도시적 상황에 대한 은유로 사용된다.

그래서 J. B. 잭슨은 "풍경이 가지는 아름다움의 본질은 인간이 존재함으로써 완성된다"고 했다. 결국, 풍경에는 자연과 환경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사람과 자연, 인간의 감정, 그리고 집단의 문화가 녹아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길게 그림 속에 등장하는 풍경에 대한 의미를 나열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창원의 도시 풍경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까닭이다.

창원의 풍경은 어릴 때 우리가 살던 모습이 아니다. 마산의 풍경은 너무도 바뀌어서 그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진해는 그나마 원도심이 여러 가지 통제로 묶여서 그 형태를 겨우 유지하고 있지만 도시는 끊임없이 간섭을 받으면서 형태가 바뀌어 가고 있다. 바다는 이미 가포 매립과 해양신도시 개발로 메워졌고, 대부분 동네는 고층빌딩으로 이전 모습을 알 수 없을 만큼 풍경이 바뀌었다. 진해도 원도심을 빼고는 대부분 바뀌었고, 구 창원은 계획도시 개발로 완전히 바뀌었다.

무학산이나 장복산, 봉림산에 올라보면 우리도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창원의 풍경이 자연과 우리가 공생하면서 만들어가는 진행형이라면, 이제는 다양한 국면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개발이라는 핑계로 혹은 재생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건설하려고 하는 도시가 우리 앞에 어떤 모습으로 일그러지고 있는지 마주할 일이다.

도시풍경에서 그려지는 것이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반추하고 물으며 또한 삶의 방식을 비판하고 수정하는 것이라면, 도시풍경은 감성적 자아를 포함하여 다양한 이론적 함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특히 풍경이라는 주체의 시선에 포착되는 특별한 정경이나 상황은 중립적인 것이지만, 결국 자기반영성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반성적인 공간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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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의 풍경을 그리는 화가의 그림 속에는 어떤 반성적인 공간이 표현되어 있을까? 그림 속에는 소리를 담지 못하지만 뼈대만 남은 건물을 굴착기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수고 있었고, 옆 건물에서는 마스크까지 낀 일꾼들이 지붕에 올라 슬레이트를 걷어내고 있었다. 또 건물 옆에서는 철거과정에 나오는 쓰레기를 담아 옮기느라 트럭들이 도열해 있다. 그리고 회원지구의 주민들은 집이 헐리는 모습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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