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농촌 거센 탄압 속 새로운 사회 열망
20대 신사상 익혀 부산 공장행, 노조·농촌운동 주도

그의 20대 시절은 1930년대다. 이 시기 일제는 한반도를 대륙 침략 기지로 삼는 병참기지화 정책을 노골화했다. 군사력을 키우는 데 혈안이 됐고, 세계 대공황이 덮쳤기에 공장과 같은 노동 현장에서도 탄압이 거세졌다. 23세 이금복(李今福·1912~2010)은 부산에 있는 공장에 들어간다. 공훈록에 실린 짧은 문장이지만, 고성 출신 여성독립운동가 이금복의 삶을 들여다보면 당시 청춘의 고민과 사회운동 흐름이 읽힌다.

▲ 이금복. /고성군

◇신사상을 접하다 = 공훈전자사료관(e-gonghun.mpva.go.kr)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보면 이금복은 1925년 9월 고성군 하일면 공립보통학교 3학년을 중퇴했다. 3년 뒤 17세(1928년께)에 박대영(朴大榮)과 결혼한다. 그런데 박대영은 1932년 6월께 '삼천포독서회사건'으로 도피하던 상황이었다. 전국적으로 독서회는 청년들이 민족·계급의식 고취를 위해 결성한다. 이때 이금복은 남편의 동생 박대홍(朴大鴻)이 권한 <별의 나라> <집단(集團)> 등 사상 서적을 읽게 된다. 남편과 시동생 영향으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바람도 커졌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1934년 8월께 이금복은 부산에 와서 목도조선법랑철기(牧島朝鮮琺瑯鐵器)주식회사에 여공으로 취직한다. 목도(牧島)는 영도(影島) 옛 이름 하나로 전해진다. 이금복은 이곳에서 정충조라는 인물을 만나 적색노동조합을 다시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탠다. 동지 박보홍·이춘근 등과 함께했다.

1936년 2월 8일 <조선중앙일보>에는 '전라남도 조선공당재건, 정충조 등 공판에, 일시는 백여 명이 검거되어, 13명의 예심 종결'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정충조는 영등포 부산 대구 등지서 동지규합, 동분서주'라는 내용도 기록돼 있다. 정충조, 박보홍, 이춘근, 이금복 등이 관련 인물로 실렸다. 이들의 적색노조운동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연결됐는데, 광주, 전남 여수·목포·순천, 마산, 부산, 대구 등 영호남 다양한 지역이 활동 무대였던 것으로 헤아려볼 수 있다.

이금복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돼 1935년 3월 26일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그러나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후 1938년 삼천포를 중심으로 적색농민조합 일을 돕다가 이금복은 또 붙잡힌다. 1939년 8월 30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전처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당일 출옥했다.

▲ 고성군 하일면 오방마을에 있는 이금복 생가터. 지금은 이금복의 조카 이종원(62) 씨가 새집을 지어 살고 있다. /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노동·농민운동의 씨앗 = 이금복이 뛰어든 적색(赤色)노동조합·적색농민조합운동은 시대상을 보여준다. 공장에서는 노동 조건이 갈수록 나빠졌고, 경제적 수탈도 심해 농촌사회가 무너졌다. 이 같은 착취에 맞서 도시와 농촌 곳곳에서 저항 정신이 꿈틀대고, 독립과 새로운 사회를 향한 열망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적색노조운동은 1930년대 노동운동 주류로 일컫는다. 코민테른(국제공산당) 지도로 결성된 좌익 노동조합의 국제 조직인 '프로핀테른' 영향을 받아 비합법적·혁명적 노조운동이 한반도에서도 펼쳐졌다. 교양·선전·조직 활동이 주로 이뤄졌고, 흥남·원산·평양·해주·용산·여수·마산·항만적색노조 등이 일제에 붙잡힌 대표적 적색노조로 거론된다.

이들은 △임금 인하·노동시간 연장 반대 △임금 인상 △8시간 노동제 △성·연령·민족 구별 없이 동일노동 동일임금 지급 △사회보험 △해고 반대 △매주 1일 유급휴가 △성년은 매년 2주간·소년은 매년 1개월 유급휴가 △파업·단체권 확립 △출판·집회 자유 △모든 정치범 즉시 석방 △조선과 만주에서 일본군 철퇴 등을 요구했다. 이금복의 활동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적색노조운동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연결돼 일제의 거센 탄압을 맞닥뜨려야 했다.

농촌에서는 적색농민조합운동이 잇따랐다. 소작권 박탈·고리대 착취·토지와 식량 약탈에 강력히 반대하며, 친일기관에 대항한 투쟁이었다. 함남 단천·함남 정평·강원 삼척·경남 양산·함북 명천 등이 대표 지역으로 전해진다.

▲ 고성군 하일면 송천리 474번지에 있는 '항일투사 이금복 선생 공적비'와 묘소. /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애국지사 재조명 반갑다" = 고성군 하일면 송천리 474번지. 바다를 낀 도로를 달리다 보면 애국지사의 묘지임을 알리는 작은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오른쪽 산길로 20여 m 올라가면 묘비가 눈에 들어온다. '항일투사 이금복 선생 공적비'. 그 뒤로 이금복의 묘소다.

인근에 있는 하일면 오방마을에 이금복 생가터가 있다. 지금은 이금복의 조카 이종원(62) 씨가 새롭게 집을 지어 5년째 살고 있다. 이 씨는 "창원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며 "예전에는 작은 집 5채가 모여 있는 구조였다"고 설명했다. 오방마을에서 태어난 이금복이 좌이산 너머 송천으로 시집을 갔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이 씨는 "내가 7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고모와 거의 왕래가 없어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고모가 안타깝게 백수(白壽·99세)를 얼마 안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셨다"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애국지사 재조명이 반갑다. 우리도 고모처럼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정부는 2008년 광복절 대통령표창을 이금복에게 전달한다. 포상이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이금복은 2년 뒤인 2010년 4월 25일 진주 한 요양원에서 타계했다. 생전에 '경남 출신 마지막 여성항일운동가'로도 불렸기에 안타까움을 더했다.

지난해 고성군은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고성의 유일한 여성독립지사 이금복 선생'을 8월의 고성인물로 선정했다. 이처럼 작은 실천이지만 고향에서부터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고 있어 다른 지자체의 본보기가 되겠다.

▲ 1936년 2월 8일 자 <조선중앙일보>에 나온 '전라남도 조선공당재건' 관련 기사. 이금복 등이 관련 인물로 실렸다(지면 가운데 배치된 기사).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참고문헌

<한국근현대사사전>, 한국사사전편찬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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