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람에 교육 필요없다"망언에 격분
김두석, 신사참배 반대 앞장
최봉선, 친일파 김기정 성토

마산지역 독립만세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의신여학교는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창신학교서 분리돼 1913년 설립됐으며 초대 교장은 호주 선교사 맥피다.

의신여학교 학생은 근대 교육을 받으며 세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동참했다. 일제에 항거한 의신여학교 출신 김두석과 최봉선에 대해 알아본다.

▲ 김두석. /〈독립기념관〉 2017년 8월호

◇강한 책임감 보인 교사 = 김두석(1915~2004)은 문화운동부문에서 유일하게 서훈된 여성독립운동가다.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식민지정책을 비판해 옥고를 치렀다.

김두석은 1915년 11월 17일 마산 성호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특히 아버지(김규태)가 자녀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김두석은 꽤 공부를 잘한 모양이다. 1930년 3월 23일 자 <동아일보>에 '마산 의신여학교 제15회 졸업생 십 명 중 우등생은 김두석 양'이라고 언급됐다.

그는 교장 추천으로 부산 일신여학교에 진학했다. 배움에 대한 뜻이 컸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졸업 후 마산 의신여학교로 돌아와 교편을 잡는다. 그러던 중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일제는 전쟁 승리를 위해선 정신적 통일이 필요하다며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김두석은 거부했다. 급기야 그는 '주요 인물'이 됐고 경찰 출두명령서를 받게 된다.

"저는 신사참배를 할 수 없습니다."

"왜 못한다는 거지?"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미워하시는 죄가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그렇다면 내일부터 학교 일을 그만두게."

그가 쓴 <두 감나무 고목에 활짝 핀 무궁화>(1985년)를 보면 교사로서 책임감이 강하게 느껴진다.

"나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 물론 교회 안에서 하는 동방요배와 일장기 경례도 하지 않았다. 가정에 있는 사람 같으면 혼자 하지 않는 것으로 끝난다. 허나 나는 교사였다."

김두석은 1938년 평양여자신학원에 가서도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선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5회에 걸친 구금과 28일간 수감 생활을 겪었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꺾지 못했다. 김두석은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식민지 수탈을 더욱 강화한 데에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결국 그는 1944년 부산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 8·15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부산 일신여학교를 같이 다닌 공덕귀(윤보선 전 대통령 부인)는 '일제의 끈질긴 조롱과 모욕이 치욕스러웠지만 그래도 내 나라, 내 민족의 교도소에 있었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가슴이 뭉클했다고 전했다.

▲ 1920년대 창신의신여학교 교우들과 함께한 이승규 손덕우 이상소 장로성역기념식. 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섰던 학생들의 모습을 헤아려볼 수 있다. /독립기념관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sajeok.i815.or.kr)

◇마산 3·1운동에 앞장선 학생 = 1919년 3월 21일 오후 3시 30분 장날. 마산 의신여학교와 창신학교 학생과 교사는 '조선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3000여 명 군중 사이에 15살 최봉선(1904~1996)이 있었다. 그는 이날을 기다리며 김남준·이수학·안음전 등과 함께 결사단을 조직해 독립만세 운동을 계획했다.

8년 뒤 최봉선은 통영서 일어난 '김기정 징토(懲討)시민대회'에 참여한다. 친일파 김기정은 경상남도 평의회 의원이었다. 도평의회는 일제가 지방자치제 명목으로 설치한 자문기관. 조선인 소수에게만 정치참여를 허용했다.

당시 김기정은 도평의회 석상에서 민족 비하 발언을 서슴없이 했다.

남해군 도평의원 윤병호가 1면 1교제(한 면에 보통학교 하나)를 제안하자 "무슨 소리냐? 조선 사람에게는 교육이 필요치 않다. 조선 사람은 보통학교만 나오면 사상이 악화하여 불량한 짓을 하고 사회운동의 선봉이 된다. 지난 1919년 소요 이래 당해 보지 않았느냐? 조선은 교육으로 망했다"고 했다. 나아가 "도평의회에 조선어 통역을 철폐하자. 황국어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도평의원 자격이 있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를 뒤늦게 안 민중들은 격분했다.

김기정 징토시민대회는 두 달간 지속했다. 민중들은 그의 망언을 전국에 알렸고, 경찰서와 그의 집을 습격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따르면 통영 전 시가 완전 '전시상태'였다.

최봉선도 합류했다. 그는 김기정 집 앞 도로에서 군중에 "문을 부수고 침입하자, 김기정을 죽이자"고 지휘했다. 이 시위에 기생 이소선(이국희)·강명순·주순이도 함께했다. 당시 최봉선 직업은 불분명하다. 기사마다 유치원 보모 혹은 학생이라고 언급됐다. 그는 1928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요 혐의로 징역 6월형을 받았으나 1년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최봉선은 마산 의신여자고등공민학교와 마산 의신여자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 김두석이 의신여학교 우등졸업생으로 소개된 기사. 〈동아일보〉 1930년 3월 23일 자. /〈독립기념관〉 2017년 8월호

※ 참고문헌

논문 <1920년대 통영지역 청년운동과 '김기정 징토운동'>, 김상환, 2014
논문 <식민지 조선에서의 도평의회의 정치적 전개-김기정 징토 시민대회를 중심으로>, 김동명, 2011
월간 <독립기념관> 중 '신사참배 거부의 격랑에 몸을 던진 여교사, 김두석', 심옥주,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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