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 대가로 북한 침공 않겠다는 미국
평화 거부해온 게 자기라는 자백 아닌가

며칠 전에 어떤 분을 만났다. 나는 이 '어떤 분'에 대해 최대한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할 셈이다. 왜냐면 습관적으로 내 몸에 밴 자기 검열이 있어서다. 지금은 많이 덜하긴 하지만 북한 이야기를 할 때면 바짝 위축되어 알아서 기는 내 습관 때문이다. 30여 년 전에 북한과 관련해서 말도 안 되는 간첩 혐의로 너무너무 모진 고초를 겪은 뒤로 생긴 습관이다.

이분과 알고 지낸 지 10년이 넘는다. 나이는 74살이고 그냥 그 나이 또래의 평범한 할아버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매우 점잖은 분이라는 것이다. 예의 바르고 기품이 있고, 나서지 않고, 말이 많지 않으며 남 싫은 소리 한마디도 안 하는, 어찌 보면 소심한 분이다.

마침 티브이가 켜져 있는데 북·미 정상회담이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허 참. 저런 나라가 지구상에 또 있나? 허 참." 나는 처음에 이 말이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분 앞에서는 나도 으레 말이 적어지고 조심스러워져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세상에 미국을 저렇게 거머쥐고 이리 와라, 저리 가자, 하면서 쥐락펴락하는 나라가 북한 말고 또 있어요?"하는 것이었다. 그때 알았다. 베트남으로 북·미 회담 장소가 정해졌지만 '다낭'을 선호하는 미국과 '하노이'를 선호하는 북한이 줄다리기한다더니 결국 하노이로 결정 난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도 맞장구를 쳤다. 매우 정중하게. "정말 그렇습니다. 벌써 몇 년입니까? 저렇게 팽팽하게 미국과 맞짱뜨면서 한 치도 안 밀리고 외교전을 벌이는 나라가 북한 외에는 없지 않습니까?"

평소에 정중함과는 거리가 먼 나지만 내 말투가 정중해지는 것은 10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고 10년 이상 알고 지냈지만 이 분이 늘 깍듯이 내게 존댓말을 하기 때문이다. 이 초로의 할아버지는 한 발 더 나갔다. "단순히 외교뿐이 아니지요. 말이면 말, 주먹이면 주먹, 뭐 하나도 밀리는 게 없어요. 이게 진짜 우리 조선민족 고구려 기상 아녜요?"하는 것이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며칠 전 뉴스를 보면서 내가 했던 생각이 있었다. 미국의 비건인지 폼페이오인지 모르겠지만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강연하면서 했던 말을 듣고서다. 미국은 절대 북한을 붕괴시키지 않겠으며 침공하지도 않겠다는 말을 했다. 종전선언을 해 주겠으며 진행되던 북한 공격 군사훈련도 안 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이 말에 대해 모든 언론은 북한의 비핵화를 촉진하고자 하는 미국의 협상 유인책이라고 했지만 나는 전혀 달리 해석했다. 강도가 품고 있던 칼을 내놓고는 무기를 가지고 가지 않겠으니 만나서 같이 놀자는 식이라고 여겼다. 칼에 묻어 있는 피가 강도의 범행을 입증하는 증거품이라는 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자백을 하는 말이라고 여겼다.

북한이 비핵화한다면 미국은 그 대가로 줄 수 있는 게 종전선언이라니? 그동안 줄기차게 요구해 온 북한의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거부하고 전쟁상태를 지속하며 정전협정을 고수해 온 것이 미국이라는 고백 아니고 무엇인가. 한반도 평화를 원치 않는 게 미국이라는 고백 아니고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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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비핵화한다면 더는 북한을 전복하(는 시도를 하)지 않겠으며 북침 군사훈련을 중단하겠다니? 그동안 핵 개발이 먼저냐 미국의 북한 체제 위협이 먼저냐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으며 미국의 북한 체제 위협이 오늘의 북핵문제의 근원임을 고백하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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