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시인 소송 증거가 된 후배의 일기
세월 흐른 뒤에야 진가 알 수 있는 기록

젊은 시인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믿기 어려웠다. 문단의 내로라 하는 대선배의 술자리 추태를 목격하고 이를 일기장에 적었다. 1994년 6월 2일 작성된 최영미 시인의 일기엔 "광기인가 치기인가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 오기인가…고 선생 대(對) 술자리 난장판을 생각하며"라는 문구가 공개됐다.

일기장의 이 부분은 25년여 세월이 지난 2019년 2월 재판의 결정적 '스모킹 건'이 됐다. 고은 시인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부는 최 시인이 재판부에 낸 그의 일기장을 중요 증거로 인정했다. 고은 시인 측은 성추행과 관련, "그런 사실이 없는 만큼 의혹을 제기한 측에서 구체적인 자료를 제출하라"고 맞섰다.

재판부는 "최 시인이 고은 시인의 술자리에서의 비정상적인 행동을 목격했음을 추단케 하는 일기가 존재하고, 그 일기가 조작됐다고 볼 만한 증거는 없다"고 판단했다. 청소년 시기부터 일기를 써 온 최 시인은 자신이 폭로한 사건의 정황을 적어놓은 일기장을 찾아 재판부에 제출했다.

과거부터 일기를 오랫동안 적어오기도 힘들지만, 그것을 원본 그대로 보관해오는 것도 놀랍다. 증거재판주의에서 일기장이 유력한 물증으로 재판의 결과를 바꿔놓게 될 줄이야 일기를 작성한 당사자도 몰랐을 것이다.

일기의 힘은 위대하다. 법정의를 실현하는 도구가 됐고 억울한 피해자를 막는 보호막이 된 셈이다. 물론 아직 최종심은 남아 있지만, 중요한 1심 판결을 승소로 이끈 일기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일기의 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해진다. '손안의 스마트폰' 세상에 사는 요즘 중·고, 대학생들은 기록을 귀찮고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일기가 주는 장점은 기록 그 이상이다. 위대한 연설가, 대중을 사로잡는 화법의 주인공들 공통점은 일기든, 메모든, 아이디어든 적고, 적고, 또 적는 사람들이다. 미국의 오프라 윈프리의 운명을 바꾼 것은 일기였다.

어린 시절부터 고난과 좌절 속에서도 일기를 꼬박꼬박 작성한 오프라 윈프리는 "나는 누가 나에게 어떤 나쁜 짓을 했는지 매일 일기를 썼다…일기를 쓴 과정은 내 아픔을 치유하는 치료였고 내 성장의 증거였다"라고 썼다. 일기는 자기표현력을 강화하는 법이다.

달변가, 웅변가로 손꼽히는 오바마 전 대통령은 "지금도 노트에 뭔가를 기록하고 일기를 씁니다. 제가 믿는 것, 제가 보는 것, 제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보다 명확하게 하는 훈련이죠. 어지럽게 뒤엉킨 생각의 타래를 문장으로 풀어내면서 더 어려운 질문을 던질 수도 있고요"라고 타임지 인터뷰에서 말했다.

14살 안네 프랑크는 일기로 전쟁의 광기를 고발했다. 나치의 눈을 피해 비밀방에서 숨소리 하나 낼 수 없을 만큼 긴장과 고통 속의 일상을 소녀의 눈으로 기록했다. 안네는 독일 패망 직전 홀로코스트의 희생양이 됐지만 살아남은 아버지가 뒤늦게 딸의 일기장을 발견, 출간하게 됐다. <안네의 일기>는 책으로 영화로 전세계 시민들에게 나치가 얼마나 잔인하게 유대인을 괴롭히고 학살했는지를 증거하는 강력한 기록물이 됐다. 네덜란드 안네의 집은 국립박물관이 됐고 현재도 전세계 유대인들의 필수방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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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언어 동물로 존재하는 한, 적지 않는 자는 경쟁력이 없다. 자기표현력이 부족한 사람은 대부분 일기를 쓰지 않는다. 일기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고 작가, 대중연설가로 이끄는 길이다. 내가 찾는 일기, 그 일기의 힘은 세월이 흘러봐야 진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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