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뒤쫓는 폭력남편 상징
튜바 둔중한 음색 공포감 더해

억울할 수도 있겠다. 자신이 창조한 음악이 후대들의 쓰임새로 인하여 불길한 것으로 여겨지거나 특정한 장면과 연결되는 곡으로 역할이 제한되어 버린다면 말이다. 청각과 결합된 이미지는 뇌리에 오래 그리고 선명히 남는다. 영화나 대중매체를 통해 노출된 음악은 이미 어떠한 이미지들과 연결되어 있어 시각적 상상을 요구하지 않기에 그만큼 쉽게 다가오지만 그만큼 상상력을 제한하는 역기능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모차르트도 피해자다. 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편지의 이중창'을 들으며 음악에 발이 묶여버린 쇼생크의 죄수들을 연상하는 것은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본 이라면 피해가기 어렵다. 이렇게 감동적인 장면에 쓰였다면 그나마 다행, 베를리오즈의 대표작은 영화 <샤이닝>에 사용됨으로써 그 선율이 흐를 때마다 금방이라도 피의 파도가 덮쳐 올 것만 같다.

1990년 로맨틱 코메디 영화 <귀여운 여인>의 주연을 맡아 스타덤에 오른 줄리아 로버츠, 다음해인 1991년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 <적과의 동침>으로 관객을 찾아 온다. 그리고 <샤이닝>에 이어 또 한번 베를리오즈의 음악이 우리의 가슴을 옥죄어 온다.

▲ 영화 <적과의 동침> 장면들./캡처

◇'침입자'의 음악

평화로워 보이는 바닷가, 그리고 그곳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저택이 있고 그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 로라(줄리아 로버츠)가 한가롭게 해변을 산책 중이다. 행복해 보이지만 그렇지 못하다. 그녀의 남편 마틴은 결벽증에다 의처증까지 지니고 있는 괴물 같은 존재다. 화장실의 수건들은 정확히 일직선이 되어 있어야 하고 부엌 선반의 물건들은 가지런해야 한다. 의처증에 수반한 무자비한 폭행까지 가하는 마틴. 더욱 섬뜩한 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사랑한다고 속삭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 없는 섹스, 이때 마틴은 항상 같은 음악을 틀어 놓는데 바로 프랑스의 작곡가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이다. 이 곡은 아내 로라에 대한 정서적인 제압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듯 영화에 사용된다. 하니 로라에게 이 곡은 악몽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마틴과 의사, 그리고 로라는 함께 요트를 타고 밤바다로 나간다. 일기예보와 달리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하고 배가 뒤집히기 일보직전, 간신히 배를 일으키지만 로라가 보이지 않는다. 물에 빠진 로라를 미친 듯이 찾는 마틴, 하지만 벗겨진 구명조끼만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온 마틴은 절망에 빠지고 그녀의 장례식을 치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로라의 치밀한 탈출 작전이었다. 평소 물을 무서워하던 그녀는 수영을 배웠으며 집 앞 가로등의 전구를 깨고 자신이 헤엄쳐 갈 장소를 표시해 둔다. 그리고 바다로 뛰어든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그동안 준비해왔던 물건들을 챙겨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탈출에 성공한 그녀는 그녀를 아는 이 없는 낯선 곳에서 '사라'라는 이름으로 새 인생을 시작한다. 이때 우연히 알게 된 대학강사 벤은 그녀와 가까워지려 노력하지만 마음을 쉽게 열어주지 않고 그녀에게 아픈 과거가 있음을 짐작한 벤의 이해와 배려로 두 사람 사이는 점점 가까워진다.

한편 남편 마틴에게 걸려운 한 통의 전화, 수영강습을 함께 받았다는 이의 말에 이상함을 느낀 마틴은 집을 샅샅이 뒤지다 우연히 변기에서 로라가 버리고 간 결혼반지를 발견하고는 그녀가 살아있음을 알아챈다. 그녀의 뒤를 쫓는 마틴, 마침내 흔적을 찾아낸 그는 벤과 로라의 데이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의 눈은 분노로 가득하다.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로라, 갑자기 흘러나오는 베를리오즈의 음악, 그리고 엉망으로 걸어놓았던 수건이 가지런하다. 마지막 희망을 품으며 확인한 부엌 선반의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본 로라는 공포에 휩싸여 입을 막고 오열한다. 그런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마틴, 그의 다정한 어투에 몸에서 서리가 내리는 듯하다. 이상한 낌새를 채고 찾아온 벤마저 마틴에게 제압당하고 이때 던져진 총을 주워든 로라, 그리고 자신을 쏘지 못하리라 확신하며 다가오는 마틴, 하지만 로라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전화를 들어 경찰에 전화를 걸어 이야기한다. "침입자를 제거했어요". 그러곤 단호히 방아쇠를 당긴다. 자신의 인생에 거칠게 침입하고 유린한 적을 향해서.

▲ 영화 <적과의 동침> 장면들./캡처

◇환상적인 무서운 결말

1830년 베를리오즈는 여배우 스미드슨을 만난다. 첫눈에 사랑의 열병에 휩싸인 그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그녀에게 구애하지만 거절당하며 방황이 시작된다. 깊은 슬픔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파리 근교를 배회하며 시간을 허비하던 베를리오즈, 그는 의식을 잃었고 죽은 듯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베를리오즈는 기이한 환상으로 가득한 꿈을 꾸게 되는데 그 꿈을 음악으로 풀어낸 것이 바로 그의 대표작 '환상교향곡'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표제적(이야기) 교향곡인 '환상교향곡'은 어떠한 이야기일까? 먼저 악보에 실려 있는 글이 바탕이 된다. "사랑에 미치고 인생이 싫어진 젊은 예술가가 아편을 마신다. 독약의 양은 죽음에 이르기는 약해 깊은 잠과 꿈을 가져다줄 뿐이다. 그 속에 예술가의 사랑 이야기가 재현되어 환상적인 무서운 결말로 이끌어 간다."

이러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환상교향곡'은 총 5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악장마다 제목이 있다. 1악장 '꿈, 정열' / 젊은 음악가가 이상형을 발견하고 사랑에 빠진다. 2악장 '무도회' / 화려한 무도회장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발견한다. 3악장 '전원의 풍경' / 방황하던 젊은이가 평화로운 전원에서 목동의 피리 소리를 들으며 취하는 영혼의 안식. 4악장 '단두대로의 행진' / 음독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죽음 대신 무서운 환상의 깊은 잠에 빠져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죽이고 단두대로 끌려가 최후를 맞이한다. 5악장 '마녀의 밤 축제와 꿈' / 죽은 후 마녀들과 요괴들이 몰려들어 젊은 예술가를 매장하려 하고 천박한 창부가 되어버린 사랑하는 여인마저 악마들의 밤의 향연에 빠져들어 지옥 같은 축제가 벌어진다.

이러한 이야기로 구성된 '환상교향곡'에서 영화에 사용된 것은 바로 5악장이며 이 중에서도 교회 종소리와 함께 둔중한 튜바 소리로 시작되는 '진노의 날' 주제부분이다. 하니 <샤이닝>이나 <적과의 동침>과 같은 영화에 사용되어도 크게 억울할 일이 없는 곡인 것이다. 육중한 음색을 지니고 있는 남성적인 악기 튜바, 어두운 세력이 한발 한발 다가오는 듯 음산한 소리는 영화에서 마틴의 주제처럼 사용되어 그 공포감을 더한다.

▲ 영화 <적과의 동침> 장면들./캡처

◇폭력에 항거하라

폭력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더라도 상대방의 영혼을 파괴한다. 따라서 폭력은 이유를 막론하고 죄악인 것이다. 폭력의 범위를 정서적인 부분까지 확대해 보자. 과연 나는 비폭력자인가? 혀에 발린 독과 창으로 상대방을 상하게 했던 적은 없었던가 스스로 자문해 볼 일이다. 언어로 행하여지는, 특히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행하여지는 폭력은 피해자에게 아물지 않는 상처로 다가와 물리적인 아픔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준다. 영화의 제목처럼 자신의 삶에 함부로 끼어든 폭력은 적이다. 만약 피해자로서의 입장에 서 있다면 단호해야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로라는 자신의 행복을 막아서는 폭력 앞에 단호하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놓아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용기를 내어야 하는 것이다. 폭력에 대한 항거는 폭력이 아니다.

"침입자를 처단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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