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배 시집 〈희망 수리 중〉
손에 닿을 듯한 감각적 시어
시골 모습 선명하게 담아내

도시적인 음악이 가득한 도심 카페, 젊은이들의 왁자한 수다. 빔프로젝터로 벽면에 비친 채 소리 없이 돌아가는 영화. 그 사이에서 이성배의 시집 <희망 수리 중>(고두미, 2018년 12월)을 펼쳐든다. 묘하게 비현실적인 기분이 드는 건 그의 시들이 다큐멘터리처럼 선명하지만 조용하게 시골 풍경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음성 꽃동네와 진천 사이에 간이 버스 정류장, 버스는/ 십 분 전 떠났다. 남은 사람은 서넛/ 수직의 벽처럼 각자 서 있거나 길다란 간이 의자에 앉아있다./ 오후는 바닥이 뜯긴 빈 상자 같이 밍밍해서/ 각자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 (중략) 간이 정류장에 너무 오래 앉아 있거나/ 너무 오래 서 있던, 문득 그늘 깊은 사람 하나가/ 가벼운 가방을 쥐고 일어나려는 순간 산모퉁이를 돌아 천천히/ 목적지를 읽히며 버스는 온다." ('버스가 오는 시간' 중에서)

"집집마다 그만그만한 노인들이 산다. 아주 가끔/ 심심한 아이가 노인 손에 이끌려 근처 슈퍼를 간다.// 떠나면서 챙겨가지 않은 낡은 장롱들이 며칠/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만 대개/ 노인들은 연립 입구 시멘트 바닥에 앉아 열무를 다듬거나/ 고추 같은 오래 두고 먹을 식량을 말린다." ('평화연립' 중에서)

시인은 꽤 오랜 세월, 이 풍경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고 어우러지며 살았을 테다. 그래야, 삶의 비애를 이렇게 묵묵한 장면으로 담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열여덟 기식이는 읍내 중국집 배달원 (중략) 비 오는 밤, 십리 길을 달려서도 자장면이/ 야들야들하다고 칭찬받은 읍내 배달계의 유망주. / 오토바이 타고 달릴 때는 송골매 같고/ 홀에 앉아 단무지 포장할 때는 발목에 줄 묶인 닭 같던 아이.// (중략) 늦은 오후 터미널 사거리/ 생과 생이 충돌한 현장에 짬뽕 국물이 쓸쓸하게 번졌고/ 황급히 모여든 사람들은 그제서야 삶이라는 게 맵고 짜다는 걸 목격했다." ('배달원 기식이' 전문)

"학재골 양반의 할아버지가/ 경북 선산에서 문경 새재 넘어 괴산으로 올 때/ 지게 하나에 허기진 삶이 모두 얹혔다고 했다.// 그니는 마을 끝에 집을 짓고/ 팔 남매를 키웠다.// 수수깡을 얼키설키 엮어 흙벽을 쌓고/ 초가지붕을 얹었다./ 양손을 허리춤에 얹고 얼마나 흰 웃음을 웃었을까.// 허물어지는 흙벽을 몇 번 덧바르는 동안/ 서까래 위로 슬레이트 지붕이 들었다./ 효심 지극한 팔 남매가 앞 다투어 집을 떠났다.// 고추를 널어 말리는 듯 붉은색 컬러강판으로/ 지붕을 곱게 단장한 후, 학재골 양반은/ 이듬해 돌아갔다." ('한 생애' 전문)

시집을 덮고 고개를 드니 왁자한 카페의 소리가 다시 덤벼든다. 아이러니하게도 비현실적인 것은 오히려 이 카페 풍경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또한 이성배 시인처럼 피하지 않고 단단한 시선으로 꿋꿋하게 바라보고 있어 보는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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