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더듬는 연기 지도'더는 눈 감지 않기로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저
예술인 교육용 실제 사례
위계문화·노동 문제 짚어

지난 16일 오후 2시 창원시 의창구 명서동 도파니아트홀에서 한국연극협회 26대 이사장 후보 공청회가 열렸습니다. 참관을 하면서 후보들이 낸 공약을 살펴보니 두 후보가 낸 공약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기호 2번 오태근 후보의 '의식 개선을 위한 한국연극성평등위원회 설립'과 기호 3번 손정우 후보의 '연극인 인권센터 설립'입니다. 이날 이와 관련한 질문이 없어 아쉽기는 했지만, 한국연극협회 수장 후보들이 이런 공약을 낸 것은 지난해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미투' 운동 덕분이겠습니다. 당시 연극계 성폭력 폭로가 유달리 많았습니다. 장르 특성상 위계질서가 엄격한 환경이어서 더욱 그랬지요.

피해자들이 계속 나오자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이란 단체가 결성됐습니다. 이들은 피해자들과 함께하며 문제 해결과 대안 마련에 애를 썼습니다. 지금도 활동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겨우 1년 만에 획기적인 변화가 이뤄졌을 리가 없으니까요. 고질적인 병폐와 관행들이 미투 운동에 화들짝 놀라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겠지요. 제도 마련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사고방식이 바뀌고 그렇게 해서 일상이 바뀌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어쨌거나, 이 단체가 최근 <불편한 연극>이란 책자를 냈습니다. 바로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교육용 성폭력 예방 사례집이라고 하겠습니다.

◇제도뿐 아니라 일상 속 변화를

▲ 책자 형태로 배포 중인 <불편한 연극.>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우리의 생각보다 연극계 내 성폭력 문제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고, 아주 오랫동안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위계 문화와 함께 우리의 현장 곳곳에 뿌리박혀 있었습니다. (중략) 피해자들을 위한 연대 활동을 이어가고, 정기적으로 포럼을 개최하며, 처벌 및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를 만들어가는 등 노력을 해나가면서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의 구성원들은 현장 연극인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성평등한 작업환경을 위해 기존의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과는 다른 현장의 공연예술인을 위한 성희롱, 성폭력, 더 나아가 위계 및 공정성, 젠더 감수성에까지 이르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담아 <불편한 연극>이라는 제목으로 사례집을 구성했습니다." (머리말 중에서)

책자는 '선배의 교태 수업', '오늘도 새우의 등은 터진다', '잘못은 언제나 아랫것들 몫', '뒤풀이는 연습의 연장이다', '제작비의 행방을 찾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모두 6개 장면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어느 정도 각색은 했지만, 모두 실제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장면마다 대본 형식으로 상황을 보여주고, 이 상황을 두고 토론을 할 수 있도록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선배의 교태 수업'은 연극 연습과 연기 지도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피해 사례입니다.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된 만큼 이제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신체접촉과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끔 하지는 않겠죠. 하지만, 가해자들의 전형적인 해명이 '연기 지도'였거든요. '딸 같아서 그랬다'는 말과 비슷한 변명입니다.

"현장에서 연기 지도를 빙자한 성폭력은 매우 질이 나쁘지만 비일비재합니다. '연기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지도자 혹은 선배라는 위계를 기반으로 현장에서 이뤄지는 성폭력은 1) 배우, 연기라는 잣대를 들이대기에 피해자가 거부하기 어렵지만, 결국 저항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게 됩니다. 2) 연극, 선배라는 권위 위에서 발생되기에 피해자는 더욱 무력해집니다. 3) 가해자는 성폭력을 하면서도 스스로 '상대(후배)를 위한다'라는 명분까지 취합니다." (9쪽)

◇이제는 많이 바뀌었다지만 더욱 조심해야

▲ <불편한 연극> 6쪽 내용 일부.

사례를 읽다 보면 꼭 연극계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직장인들도 겪을 만한 일도 있습니다. '뒤풀이는 연습의 연장이다'라는 항목이 그렇습니다. 직장인으로 치면 '회식도 업무다'란 말과 똑같지요? 다음 대화를 보겠습니다. 술자리에서 벗어난 여성 후배들을 꾸짖은 내용입니다.

"누구는 지금 저기 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알아? 연극이 뭐야, 팀워크잖아. 다른 단원들 고생하는 거 안 보여? 너희 이렇게 나가있으면 다른 단원들이 선생님이랑 이야기하고 분위기도 띄우고, 너희보다 어린 여자애들이 너희 대신 고생하는 게 쪽팔리지도 않냐? (중략) 너희는 희생정신도 없고, 공동체 정신도 없냐?" (39쪽)

이런 대화 뒤에 달린 설명을 보면 술자리가 단순히 위계가 높은 사람을 즐겁게 만들기 위한 기능을 하는 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런 역할을 하는 이들이 '여성'이어야 한다는 분위기 자체가 성차별이자 성희롱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하죠. 물론 요즘에는 이런 술자리가 많이 사라졌죠.

문화예술계 선후배 관계를 살펴보는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항목에서는 저도 많이 공감하고 반성도 하게 되더군요. 나이, 학연, 지연에 따라 선후배 관계가 정해지면 자연스레 선배가 후배에게 말을 놓게 되죠.

나이가 어리거나 후배가 되면 마치 미숙하거나 지도와 조언이 필요한 존재로 다뤄집니다. '너 많이 컸다?'란 말도 이런 위계질서 안에서 나올 수 있는 언어폭력 중 하나입니다. 요즘에는 이런 사람을 대놓고 '꼰대'라고 하기도 합니다만, 업무 관계인 동료를 너무 쉽게 사적인 관계인 동생이나 후배로 바꿔 생각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네요.

읽고 보니 <불편한 연극> 방식으로 문화예술계는 물론 일반 직장에서도 자기들에게 맞는 교육 자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이 결국 의도한 것도 이런 것이겠지요.

책자 형태의 <불편한 연극>은 '자유이용허락'이 된 공공저작물입니다. 무료라는 말입니다. 현재 종이책자로 만들어 배포를 하고 있지만 수량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 보입니다.

대신에 온라인으로 책자 PDF는 얼마든지 받아볼 수 있습니다. 일단 여성가족부 예방교육통합관리 홈페이지(shp.mogef.go.kr)에 '불편한 연극_연극하는 사람들이 전하는 불편한 장면들'이란 제목으로 올려져 있고요.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페이스북 페이지(www.facebook.com/theaterwithyou)에 가시면 구글 드라이브에서 직접 받을 수 있는 주소도 나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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