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대화 교수가 찾은 백석의 도쿄 유학 이야기(하)
거주지 인근 이노카시라 공원
울창한 숲서 사색하기 좋아
기치조지에 하숙한 이유 알듯
아오야마가쿠인대학 베리홀
기독교 세례받은 것으로 추정
관련 자료 확인 못해 아쉬워

백석이 일본 유학 시절 살았던 기치조지(우리말 '길상사'와 같다)는 현재 도쿄도 무사시노시에 속한다.

기치조지라는 지명은 기치조지라는 절에서 유래한다. 이 절은 원래 에도(도쿄의 옛 이름)의 혼고에 있었다. 1657년 3월 초에 일어난 메이레키(明曆) 대화재로 에도가 거의 반 이상이 불탔을 때 이 절도 소실되었다.

절은 화재 후에 인근의 고마고메로 옮겨 다시 지어졌고 일대의 주민들은 에도 바쿠후에 의하여 지금의 무사시노의 무레노 지역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이주한 주민들이 원래 자신들이 살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해 기치조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무사시노시 후루사토역사관 하다 학예관의 설명과 그가 보여준 사진으로 추측하면, 백석이 살았던 30년대 전반의 기치조지 지역은 서쪽으로 뻗어나간 나카미치 거리를 따라 민가가 군데군데 늘어선 형태였고 민가 너머로는 사방이 논과 밭인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었다.

하다 학예관의 설명으로 무사시노 시와 미타카시의 경계에 자리 잡은 이노카시라 공원의 역사를 알게 되었다. 이노카시라 공원은 이노카시라 연못과 이를 둘러싼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못은 에도 시대부터 주민들이 생활용수로 사용하던 간다상수(神田上水)의 수원지였다. 이 연못가에 8세기 후반에 창건된 신사 이노카시라벤텐도가 있다. 연못은 예로부터 뱃놀이 장소였고 주변 숲은 벚꽃으로 유명한 명소였다. 우키요에 화가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명소에도백경' 중 하나로 '이노카시라 연못 벤텐신사'(1856)라는 그림을 남겼다.

▲ 일본 근대 소설가나 화가들이 자주 찾았던 이노카시라 공원에 선 배대화 교수. 도쿄 유학시절 백석도 이곳을 걸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다 학예관은 백석 시인이 시부야에 있는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을 다닐 적에 기치조지역을 이용했을 터이니 역 바로 가까이에 있는 이 공원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또한, 이노카시라 공원 인근 지역은 일본 근대 문인이나 화가들이 살았거나 즐겨 찾은 곳이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일본 근대소설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1909~1948)는 1939년부터 죽을 때까지 공원 아래쪽의 미타카에 살면서 만년의 작품을 집필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백석 역시 이 공원을 분명히 산책하였을 것이다. 하다 학예관과의 만남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유익한 기회를 얻은 셈이다. 대단히 고맙다.

역사관을 뒤로하고 기치조지역으로 다시 가 역에서 남쪽의 공원 입구로 내려갔다.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하지만 키가 큰 나무들이 열을 지어 서 있는 산책로가 펼쳐져 있고, 울창한 숲이 연못을 에워싸고 있다. 뜻하지 않은 풍경으로 자못 감탄이 터져 나온다.

▲ 아오야마가쿠인대학 마시마 기념관 1층에 있는 '사랑의 조각상'. 요코에 요시즈미 작품으로 1930년 8월 설치됐다. 백석이 이 대학을 다닐 때 이것을 봤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못은 뱃놀이를 하고도 남을 정도로 폭이 넓고 길게 뻗었다. 멀리 연못 건너편 숲 너머로 고층건물들의 꼭대기만 보이지 않는다면 완연한 자연 속이다.

공원은 평일인데도 사람이 제법 있었다. 벤치에는 젊은이들과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온 젊은 부인들이 앉아 있고 서양인들도 몇몇 보였다. 휴일에는 꽤 인파로 붐빌 것 같았다

특히 벚꽃 철이나 단풍철이면 인파로 미어터질 것이다. 때때로 백석도 이 호젓한 공원을 산책하며 사색에 잠겼으리라.

벌써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바쁜 일정에 이노카시라 공원까지 둘러보았으니 시부야의 아오야마가쿠인대학에는 어두워서야 도착할 형편이었다. 게이오 이노카시라 전철을 타고 시부야로 이동하였다.

이 이노카시라 전철 노선은 시부야에서 이노카시라 공원역까지 1933년 8월에 개통되고 공원역에서 한 구간인 기치조지역까지는 1934년 4월에 완전히 개통되었다. 백석도 이 전철을 타고 대학에 다녔을 것이다. 시부야 역에 내리니 사방은 이미 어두웠다. 그래도 재학 중 백석이 드나들었을 1930년대 이전 건물이자 등록문화재인 베리 홀과 마지마 기념관을 보려고 갔다.

정문 수위가 사진을 찍는 우리를 불러 세운다. 촬영금지라고 했다. 방문 목적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더니 친절하게 본부에 전화를 걸어 뭐라고 물어본다. 직원이 나와서 안내를 해줄 테니 법인본부 건물로 가라고 한다. 하다 학예관에서 시작된 행운이 여기까지 따라온 듯하였다.

베리 홀 앞에서 구니미 ●스케라는 대학법인 총무과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퇴근 시간인 오후 6시가 지난지라 대단히 미안했고 고마웠다. 친절하게도 먼저 베리 홀 1층에 있는 찰스 오스카 밀러 채플로 안내를 하였다. 백석이 재학 중에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는 얘기도 있으니 아마 여기도 백석의 발길이 닿았으리라 싶다. 베리 홀을 나와 옆의 마지마 기념관도 둘러보았다. 구니미 ●스케 과장은 지금은 이곳에 대학사료관이 있다고 하며 백석에 관한 자료가 남아있을 수도 있으니 내일 다시 오라고 한다. 아쉽게도 내일은 귀국해야 하기에 다음으로 기약하고 구니미 ●스케 과장과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헤어졌다. 정문에서 수위에게도 고마움을 표하였다.

▲ 아오야마가쿠인대학에 있는 찰스 오스카 밀러 기념 예배당 현판. 도쿄 유학 시절 백석이 이 대학을 다니며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배대화 교수

도쿄 유학시절 백석의 작품으로 남아있는 것은 이즈반도의 남단 가키사키로의 여행 체험이 담긴 두 편의 시 '시기의 바다'와 '이두국주가도', 그리고 산문 '해빈수첩' 단 3편이다.

김자야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유학시절 백석은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1886~1912)의 시에 심취했었고 귀국한 뒤에도 그 시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이동순, 월간조선, 1999년 4월호) 이 시인의 이름에서 석(石)자를 따왔다는 견해도 있다. 기치조지에서도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를 읽거나 좋아했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작품을 읽었을 것이다.

나아가 백석 자신도 기치조지를 배경으로 하거나 주제로 삼은 시나 산문을 썼을 법도 한데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은 아쉽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기치조지를 둘러보면서 여기에서의 생활이 이후 백석 시 창작에 자양분이 되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백석이 하숙을 할 무렵 기치조지는 한적한 농촌이었다. 아직 이노카시라 전철도 개통되기 전이라 주오선(중앙선)을 타고 아마도 신주쿠역에서 열차를 갈아타거나 아니면 버스로 대학에 다닐 수밖에 없었을 텐데도 꽤 먼 이 농촌에 하숙을 정한 까닭을 생각해본다.

기치조지역 부근에서 하다 학예관이 일러준 <이노카시라 공원 100년 사진집>(분신출판, 2017)을 한 권 샀다. 사진집을 들춰보니 공원은 1917년에 개원했고 1929년에는 보트장을 개장한 것으로 되어 있다. 도시화가 진행되기 전 옛 모습은 지금보다 훨씬 더 풍광이 수려하고 숲이 울창하였다. 한적하고 광활한 들판이 펼쳐지는 농촌과 호젓하고 자연 풍광이 빼어난 이노카시라 공원에 이끌려 백석은 기꺼이 기치조지로 왔을 것이다.

시집 <사슴>의 동화적이고 토속적인 시 세계를 염두에 두면 기치조지를 백석은 무척 마음에 들어했을 것 같다. 백석의 시집 <사슴>이 출판된 당시에 이미 김기림은 백석 시 세계에서 일견 모순되는 향토주의와 모더니티라는 두 가지 양상을 읽어내었다.(김기림, 조선일보, 1936년 1월 29일 자) 당대 최고의 모던 보이였던 백석의 '모던'이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의 근대적 경관과 서로 통한다면 그가 거주했던 기치조지는 고향 정주로 이어지는 향토적 세계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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