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만 되면 되살아나는 가부장제 문화
각자의 독립된 삶 존중하고 예의 갖춰야

설 전날 아침 시어머니 전화가 왔다. "이번 설은 음식도 많이 안 할 거라 오늘은 안 와도 되겠다. 내일 일찍 오너라." 몇 번 가겠다고 했으나 진심으로 오지 말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어차피 시댁에 못 가게 되었고 친정에서도 엄마 혼자 음식 준비를 해야 해서 집으로 향했다. 여차저차해서 이번에는 먼저 왔다고 하니 엄마가 화를 버럭 내셨다. '오지 말란다고 안가냐?', '어떻게 여길 먼저 오냐?'며 온갖 타박을 다 하셨다. 음식은 음식대로 하고 욕은 욕대로 먹으면서 명절에 친정에 먼저 오는 것이 이렇게 욕먹을 일인가 싶다가도 엄마 말처럼 '오지 말라고는 하셨지만 갔어야 했나?' 싶어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명절에 친정에 먼저 가는 것, 친정에서 음식 준비를 하는 것이 이렇게 불편한 일일까?

이번 설에는 '시댁과 처가댁 중 어느 곳을 먼저 갈 것인가'와 관련한 기사가 유독 눈에 띄었다.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 어느 집이든 자녀는 한둘에 그치는 경우도 많고 아들 없는 집도 많다. 명절을 시댁에서 보내면서 외롭게 계실 부모님이 마음에 걸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명절에 시댁을 먼저 가는 것이 왜 당연할까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명절을 반드시 시댁에서 보낼 이유는 없다. 그러나 정서적으로는 여전히 시댁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부모님의 동의를 구하기 쉽지 않다. 우리 엄마처럼 친정 부모님도 먼저 오는 것을 불편해하실 수 있고 더더욱 시댁 부모님들은 '아들 잘못 키웠다', '며느리 잘못 들였다'는 한탄을 하실지도 모른다. 결국 시댁과 처가댁 중 어느 곳에 먼저 갈 것인가를 두고 부부싸움을 넘어 고부 갈등, 집안 갈등이 될 수도 있다.

역차별이라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올 정도로 우리 사회는 성평등해졌다고 하지만 명절만 되면 갑자기 과거로 회귀하는 느낌이다. 명절은 희미해져 가는 가부장제 문화, 가족 내 권력관계가 원기를 회복하고 좀비처럼 부활하는 시기인 듯하다. 평소 인지하지 못했던 여성과 남성으로서의 성역할이 극대화되고 차별이란 무엇인지 온몸으로, 제대로 보여준다. 명절은 시댁에서 느끼는 며느리로서의 설움, 시어머니와의 갈등이 그야말로 폭발한다. 명절이 지나면 이혼시즌이라고 할 만큼 이혼율이 급등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명절만 되면 가부장제 문화의 가장 큰 피해자인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왜 서로 갈등해야 할까? 한때 며느리였던 시어머니와 이후 시어머니가 될지도 모를 며느리의 연대와 공존은 불가능한 것일까?

명절은 가족이 함께 모이고 즐거워야 하는 자리이다. 희미해져 가는 가족 간 권력관계를 확인하는 자리가 아니다. 비정상적인 권력관계,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무례함과 불편함을 관습과 전통이라는 말로 감수하라고 하는 시대는 이제 지나가고 있다. 자녀라 할지라도 결혼하면 각자 독립된 가정을 이룬다. 또한, 며느리나 사위는 각자 다른 집안에서 자란 사람들이다. 가족이라고는 하나 적당한 거리감과 예의가 필요하다. 각자의 독립된 삶을 존중하고 양가 순서 가리지 않고 각자 형편대로 모이고 밥 한 끼 먹고 즐겁게 소통한다면, 시댁과 처가댁,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평화로운 공존도 가능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이것이 명절의 의미에 더욱 부합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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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불편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문화는 변화하기 마련이다. 내년 설 명절쯤에는 그 변화의 시작을 기대해봐도 될까? 어느 집에 먼저 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서로 간에 적당한 거리감과 예의를 갖춘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한, 그래서 고부갈등이 진부한 단어처럼 느껴지는 그런 명절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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