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가 터, 도로·대밭으로…무관심 속 항일흔적 방치
서훈 이후 10년 넘게 표지 없어
민족 계광학교 탄압에 자료소실
장소·행적 등 지속적 연구 필요

신여성이자 코뮤니스트였던 김조이(1904~?). 그의 생가는 어떨까. 궁금증이 앞서 현장에 가기 전 인터넷 검색을 했다. 독립기념관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 사이트서 본 김조이 집터는 '정녕 저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초라했다. 아니, 멸실에 가까웠다. '이곳 일부는 도로로 들어가고 나머지 부분은 대나무밭으로 변해 있다.'

진짜였다.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 189(창원농업기술센터 진해기술지원과 부근·당시 창원군 웅천면 성내리 189)는 정말 도로와 대나무밭뿐이었다. 어떠한 안내 표지도 없다. 김조이가 2008년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됐으니, 이곳은 10년 넘게 그냥 방치된 셈이다.

▲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에 있던 김조이의 생가 터는 도로와 대나무밭이 돼버렸다. /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오르막길을 등지고 보이는 대풍아파트는 그의 할아버지 김재형(1864~1948)이 살던 곳으로 추정된다. 김재형은 웅천군의 마지막 군수로 그의 자택은 웅천지역 3·1 독립만세운동 모의 장소였다.

김조이는 그의 집에서 가까운 개통학교 대신 계광학교를 다녔다.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단, 계광학교는 그의 외가와 가까웠고 김조이는 그곳에서 자란 것으로 보인다.

계광학교는 일제강점기 민족교육의 산실이다. 서당 금동재 운영자 배익태와 지역 유지 이병두·문석윤 등의 힘으로 1912년 문을 열었다. 개교 당시 이름은 창동학숙. 일제로부터 무인가 학원으로 탄압받자 1914년 호주 선교사 맹호은(본명 맥클레어)을 설립자로 해 인가를 받았다. 이때 계광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민족운동가들이 주로 교단에 섰고 민족혼과 독립의지를 깨우치는 교육을 했다. 교사 주기용·배재황·신자균·허전은 웅동지역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해 옥고를 치렀다.

▲ 김조이의 흔적을 찾고자 계광학교를 뿌리로 둔 웅동중학교를 찾았지만 이곳의 기록도 일제 탄압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김조이가 다녔던 계광학교는 현재 없다. 그의 흔적을 찾고자 계광학교를 뿌리로 둔 웅동중학교를 찾았다.

학교 중앙 현관으로 들어서자, 오른쪽 벽면에 커다란 사진이 눈에 띄었다. 학생들의 '웅동 4·3 독립만세운동' 재현 모습이었다. 진해지역 3·1 독립만세운동은 4월 3일 일어났다. 그날은 일본 진무천황 제삿날이자 경화동 장날. 학교 측은 구국 선열의 뜻을 기리고자 1998년부터 매년 4월 3일 독립운동을 재현한다.

1층 복도는 학교 역사를 되새겨보는 공간이다. '사립계광학교에서 본교 탄생까지'라는 제목으로 글과 연대별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아쉽게도 원본 사진은 없었다.

학교 측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김조이 관련 기록 유무를 물었다. 김조이는 1922년 1월 졸업생이다. 이용석 교사는 "1930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가 된 적이 있어 관련 자료가 없다"며 "복도에 붙어 있는 (프린트된)사진도 수소문해 구한 것"이라고 말했다.

1919년. 당시 김조이는 15살. 기록에 따르면 웅천교회에서 주기선·김조이·주녕옥 등이 여성들만의 시위를 계획했다. 그러나 4월 3일 독립만세운동 참여 여부는 알 수 없다. 향토사학자 황정덕(1927~2015) 씨는 "당일에 시위 행렬에 나서지 않은 듯 전하는 바가 분명하지 않다"고 언급했다.

웅동중학교를 떠나 격렬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웅천읍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1919년 4월 3일 격렬한 만세운동이 일어난 웅천읍성 동문, 당시 김조이 등 여성들도 시위를 계획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진해면·웅천면·웅동면에서 4월 3일 같은 시각에 면별로 시위를 하되, 웅동면은 가까운 웅천면으로 넘어와 웅천 시위대와 합류하여 헌병주재소가 있는 성내동에서 대대적으로 전개하기로 밀약을 하였다.'(<진해지역의 항일독립운동사> 중) 하지만 진해면은 하루 전날 밤 시위 준비가 탄로 나 함께하지 못했다.

증언자들은 "웅천의 하늘은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뒤흔들었다. 어른을 따르는 어린이들도 부르고, 행렬에는 끼이지 않더라도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들도 만세를 불렀다" "군중은 2000명이라 해야 할까 3000명이라 해야 할까 어른도 부르고 아이도 불렀다"고 회상했다.

웅천읍성 동문을 지나 웅천교회가 있는 서문으로 향했다.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주기철(1897~1944) 목사가 어린 시절 신앙의 싹을 틔운 곳이다. 하지만 새 단장을 했는지 시간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김조이는 18살 진해를 떠났다. 함께 현장을 둘러본 박영주 경남대 박물관 비상임연구원은 "그는 홀로 유학을 갈 정도로 배움에 대한 의지와 열정이 컸다. 혹자는 집안의 도움을 받았을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학비 마련을 위해 재봉 일을 할 정도로 고학생"이었다면서 "생가터에 아무런 표시도 없어 무관심 속에 그가 잊혀 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참고문헌

<조봉암평전(잃어버린 진보의 꿈)>, 이원규, 한길사, 2013
<죽산 조봉암 평전>, 김삼웅, 시대의창, 2010
<진해지역의 항일독립운동사>, 황정덕, 금창출판사, 2004
독립기념관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sajeok.i815.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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