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세 오경팔 옹 인터뷰
1944년 '조선독립만세'주도
단원 10명 검거돼 고문·투옥
유일 생존…공훈 인정 못받아

일제강점기 말 창원지역 10~20대 청년 10명으로 구성된 독립운동단체가 있었다. '조선독립만세' 벽보사건을 일으킨 '청년독립회' 단원 10명 중 한 명이 생존한 것으로 확인됐다.

창원보통학교 4학년생이던 오경팔(90) 옹이 서울에서 내려온 졸업생 선배 백정기를 중심으로 동기 박상규·조문대 등 10명과 함께 청년독립회를 조직한 건 1942년 7월께였다. 한 동네에 살았던 이들은 복습방에서 함께 공부하며 사이가 가까워졌다.

이와 함께 창원군 창원면 동정리에 있는 창원신사 뒤에 자주 모여 일제 식민정책,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이야기했다. 청년 10명이 항일단체를 만들기로 뜻을 모은 건 그간 나눠왔던 열망의 표출이었다. 청년독립회는 △단체 참배 때 참석하지 않기 △주위에 불참 권유하기 △우리들이 먼저 실천하기 강령을 세우고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 일제강점기에 창원 청년독립회를 조직한 단원 10명 중 유일한 생존자인 오경팔 옹이 당시 상황을 말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

◇청년독립회 조직해 '조선독립만세' 벽보 = 오 옹은 "학생들에게 신사참배할 것을 요구했지만 거부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우리들도 신사참배에 불응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회상했다. 청년독립회를 만든 이듬해인 1943년 4월이었다. 선배 백정기가 서울에 다녀온 후 "일본은 패전한다"고 이야기했다.

오 옹은 "전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면 임시정부가 전 세계에 호소할 수 있어 때를 맞춰 우리도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선배 이야기를 따랐다"며 "함께 모여 공부를 하던 방에서 밤을 새우며 '조선독립만세'라는 벽보를 써 진해헌병대로 가는 길목 요지인 창원역 등 사람들 눈에 잘 띄는 장소에 붙였다"고 말했다.

제거해도 계속 벽보가 붙자 역장이 경찰·헌병대에 연락했다. 범인 색출에 나선 일제 경찰은 1944년 5월 10일 오 옹을 비롯해 백정기·박대근·최을택 등 청년독립회 단원 10명, 창원보통학교 교사 1명 등을 붙잡아 한 달 가까이 고문했다. 하지만 증거가 충분치 않아 백정기, 교사 2명만 기소하고 모두 석방했다.

오 옹은 "기소된 2명도 이후에 석방됐는데 감시가 심해 활동이 뜸해지기도 했다"며 "시간이 지나 다시 활동했지만 12월 초 진해헌병대에 발각돼 체포됐다"고 말했다.

◇"서류 남아 있지 않아 독립유공자 인정 안 돼" = 일제는 '조선독립만세' 벽보를 붙인 일을 두고 '창원만세사건'이라고 불렀다.

경찰에 붙잡힌 청년독립회 단원들은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부산지방법원에 넘겨져 1945년 8월 15일 광복 전후까지 7~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청년독립회를 이끌었던 백정기·김명수 씨는 두 달 가까이 자행된 헌병대 고문 탓에 출옥 직후 눈을 감았다. 장재상·최을택 씨도 얼마 지나지 않아 숨졌다. 정부는 김명수·김광수·박대근·조문대·최을택·배장실·장재상·박상규 등 청년독립회 단원 8명의 공훈을 기려 훈장을 수여했다. 하지만 백정기 씨와 오경팔 옹은 훈장을 받지 못했다. 단원 모두가 눈을 감은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오 옹은 "전염병에 걸려 죽을 지경이 돼 7월 출옥했다. 부산형무소 재소자 서류를 찾아봤지만 나와 관련한 문서는 명확하게 남아 있지 않았다"며 "보훈처에서는 옥고 사실에 관한 객관적인 입증자료가 미비하다는 이유로 포상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역사 연구가 박영주 씨는 "일제 말 창원에서 10, 20대 청년들이 독립운동단체를 만들어 활동한 획기적인 사건이다"며 "비슷한 시기 있었던 마중독립단 사건과 달리 지역에 알려지지 않았다. 창원시에서 이들 활동을 기록해 후대에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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