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야마가쿠인대학 재학
영문학과 러시아어도 공부
거주지 추정 소학교 뒤편
창작열 느껴지는 듯 '감격'

지난달 경남대 국어국문학과 배대화 교수와 우무석 시인, 진헌극 이선관추모모임 공동대표가 일본 도쿄에 며칠 다녀온다는 연락이 왔다. 시인 백석의 흔적을 찾아가는 이야기였다. 그때는 갑자기 웬 백석인가 하고 갸우뚱했다. 설 연휴에 배 교수가 보낸 기행문을 읽고 보니 그와 백석 사이에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는 걸 알겠다. 그리고 그가 굳이 도쿄를 찾아간 이유도 알겠다. 배 교수 일행이 훑어본,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은 백석의 도쿄 유학시절 이야기를 두 번에 걸쳐 싣는다.

▲ 백석 옛 주소 추정지인 기치조지 4정목 17번지. 막다른 골목 안쪽으로 초록색 둥근 지붕의 초등학교 건물이 보이며 그 입구 아파트와 초등학교가 면하는 곳이 구 기치조지 1875번지로 여겨진다. /배대화 교수

1988년 북한문학에 대한 거의 전면적인 해금이 이루어진 이래 시인 백석에 관한 연구자들의 관심은 물론 일반인들의 관심도 이례적으로 매우 높다. 한국 근대시인 중에 백석보다 더 일반의 인기를 끄는 시인이 없다고 할 정도이다. 또한, 그 어느 시인보다 백석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의 양도 압도적으로 많다. 이런 백석 신드롬에 마산도 예외가 아니다. 백석은 1936년 1월에 통영으로 취재여행을 하게 된다. 이는 두 번째 통영 방문으로 취재 외에 또 다른 목적은 백석이 사모하던 박경련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 여행에서 백석은 마산의 구마산역에 도착하여 선창으로 내려가 어느 객줏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배편으로 통영으로 향했다. 이러한 행로와 시로 통영은 물론 마산에서도 백석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길상사란 이름으로 시작한 백석 연구 =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필자가 백석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2007년에 소속이 국어국문학과로 바뀌면서부터였다. 백석의 방대한 러시아 문학 번역을 중심으로 백석 연구를 하면서 눈길을 끈 말 중 하나가 '길상사(吉祥寺. 일본어로는 기치조지)'라는 절 이름이자 지명이었다. 백석은 1930년 4월에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가쿠인대학(靑山學院大學) 고등부 영어사법과에 입학, 1934년 3월에 졸업했다. 3학년 때 살던 곳 주소가 기치조지 1875번지였다. 우연하게도 백석의 연인 자야(김영한) 여사가 1997년 당시 시가로 1000억 원에 이르는 요정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창건된 절 이름도 길상사다. 법정이 자야 여사에게 붙여준 법명도 길상화다. 지금 도쿄도의 기치조지 지역에는 몇 개의 절이 있지만 기치조지(길상사)라는 이름을 가진 절은 없다. 그렇지만 백석을 연구하면서 그가 살았던 기치조지 지역을 한번은 찾아가 봐야겠다고 늘 마음에 두고 있었다.

기치조지에 있는 백석 자취를 찾아보고 싶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백석은 유학 직전인 1930년 1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와 아들'로 당선되어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렇다면, 유학시절에도 어느 정도 창작에 힘을 쏟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백석의 유학시절 작품으로는 졸업 직전에 다녀온 이즈반도의 남단 가키사키로의 여행 체험이 담긴 두 편의 시 '시기의 바다'와 '이두국주가도', 그리고 산문 '해빈수첩' 단 3편만 남아있다. 일본 유학을 경험한 근대문인들은 정지용, 권환처럼 유학시절에 일본 문예지 아니면 유학생 회지 등에 작품을 싣거나 김사량처럼 아쿠타가와 문학상의 당선후보작으로 일찍이 이름을 알리거나 하였다. 백석은 그렇지 않았다. '해빈수첩'도 귀국 후인 1935년 3월에 <이심회 회보> 제1호에 발표했을 뿐이다. 백석의 창작은 1935년부터 본격화되었다.

기치조지 지역은 백석이 대학 3학년 때의 거주지다. 필자의 일본 유학 경험으로 비추어 봐도 일본생활 3년차면 적응도 끝나고 안정된 상황에서 자신의 목표를 추구할 수 있는 시기다. 기치조지에서 백석은 학업과 동시에 문학에도 일정 몰두하고 있었을 것이며 이때의 생활은 이후 백석의 창작에 상당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기치조지에 있었던 백석의 옛 거주지 = 필자는 지난해 3월부터 8월까지 연구년으로 일본 교토대학교에 파견되어 있었다. 교토의 문화유산들을 적당히 둘러보며 교토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백석의 도쿄 자취를 찾아볼 계획을 세웠다.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은 여전히 도쿄의 시부야에 자리 잡고 있으니 별문제가 없으나 백석의 주소지 기치조지 1875번지가 난제였다. 현재의 주소체계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행정기관의 도움 없이는 알기가 어려웠다.

이 문제는 뜻하지 않게 쉽게 해결되었다. 기치조지 지역은 현재 도쿄도의 무사시노시에 속하기에 시 홈페이지에 문의를 하였더니 무사시노시의 후루사토역사관이라는 일종의 시립 민속역사박물관에 해당하는 기관에서 답신이 왔다. 이 역사관의 하다 나오히로 학예관에게서 온 더할 나위 없이 고맙고 소중한 답장이었다. 구 1875번지는 현재 지번과의 대조표에서 빠져 있었고 그 이유는 불명이라고 한다.

하다 학예관의 설명과 보내준 자료로 현재의 지도와 대조해 본 결과 구 1875번지는 현재 무사시노 시립제일소학교 옆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8월에 도쿄로 여행 날짜를 잡았으나 공교롭게도 태풍으로 교통편이 마비되어 갈 수 없었다. 귀국준비로 바빠 도쿄 여행은 결국 뒤로 미루고 말았다. 이러한 사정으로 지난 1월 22일에야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도쿄로 떠났다. 여행은 필자의 계획에 흔쾌히 동의해준 우무석 시인과 진헌극 이선관추모모임 공동대표와 함께였다. 2박 3일이지만 온전히 쓸 수 있는 날은 이튿날 하루뿐이기에 이날에 기치조지 지역과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을 방문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 백석의 도쿄 유학시절 추정 거주지 옆 무사시노시립제일소학교. 백석은 이 학교 근처에 사는 것을 좋아했을 것으로 보인다.

1월 23일 오전 기치조지역을 나와 무사시노시립제일소학교를 찾았다. 백석이 살았던 곳은 학교 뒤쪽이다. 추정되는 곳을 요모조모 둘러보았다. 백석이 살던 주소는 막다른 골목의 안쪽으로 학교와 면한 곳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6층짜리 아파트가 골목 입구에 서 있다. 무사시노시립제일소학교는 1873년에 개교해, 1911년 지금 자리로 옮겨왔다. 백석은 이 학교 바로 옆에서 살고 있었던 셈이다. 백석은 어린아이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는 훗날 '집게네 형제'를 비롯한 뛰어난 동시들을 남겼다. 소학교 옆은 분명히 백석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백석의 유학시절 후배 고정훈의 증언에 의하면 백석은 대학 3학년 때에 이미 전공인 영문학 외에도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있었다고 한다. 백석은 러시아 문학 작품을 많이 번역하였는데, 1942년 <조광> 2월호에 발표한 니콜라이 바이코프의 단편 소설 '식인호'로부터 시작하여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 1·2권, <푸시킨 시 선집> 1권, 이사코프스키의 <이싸꼽쓰끼 시초> 등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 시립제일소학교 옆 거주지야말로 백석이 한 러시아 문학 번역의 시원인 셈이다.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필자로서는 실로 뜻깊은 장소다.

▲ 후루사토역사관 앞에서 (왼쪽부터)진헌극 대표, 우무석 시인, 하다 학예관, 배대화 교수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발걸음을 무사시노시 후루사토역사관으로 옮겼다. 하다 학예관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메일에서 느꼈던 것보다 젊었다. 그동안의 도움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기치조지의 지명 유래를 묻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전시관으로 옮겨 무사시노시의 역사와 지명의 유래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붙인 사진, 그림을 보면서 그의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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