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문장에 이끌려 깊은 꿈속을 헤맸다
통영출신 1세대 한국계 미국작가
영문소설 현지 교과서 실리기도
영어로 쓴 뒤 한국어 번역 이색적
세심한 이야기 배치 '한 편 영화'

"그 배는 계절과 함께 쭈그러든 것 같이, 고향으로 가지도 못할 것 같이 내가 기억했던 것보다 아주 작아 보인다."

너무나 맘에 드는 소설의 첫 문장이다. 뚜렷하지 않은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해서다. 이어지는 문장은 이렇다.

"많은 선객들을 보자 나도 그 틈에 끼었다. 배에 오르니 생선, 해초 냄새- 이제야 고향에 들어선 것 같다."

이제야 첫 문장이 선명해진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는 주인공이 느낀 세월의 거리감.

▲ 1948년경 미국 켄터키대학 시절 김용익. /통영예술의향기

마치 어른이 되고 나서 다시 어릴 적 뛰놀았던 옛 동네 골목이나 초등학교 운동장을 찾았을 때 골목과 운동장이 이렇게 작았나 싶은 낯섦과 비슷하다. 이 소설은 통영에 있는 출판사 '남해의 봄날'에서 의욕적으로 재발간한 김용익 소설집 두 권 중 1권 <꽃신>에 실린 '밤배(From Here You Can See The Moon)'다. 자전소설이라 할 만한 이 소설에서 말하는 고향이란 통영일 것이다. 소설가 김용익(1920∼1995). 그는 통영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고, 나중에 미국에서 시민권을 받고 창작활동을 한 1세대 한국계 미국작가다.

현재 통영시 주전3길 18번지에 있는 그의 생가터에 김용식김용익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외교관으로, 외무부 장관 등 고위 행정가로 승승장구한 형 김용식(1913∼1995)과 달리 김용익은 작가와 교육자로만 살며 평생 어떤 권력이나 특권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의 영어 소설은 일찍이 미국과 유럽에서 인정받아 마술의 펜이란 별명도 얻었다. 그리고 그곳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소박한 신념으로 조용한 생활을 이어갔다. 심지어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어와 한국어의 묘한 교차소설 '꽃신' '씨값' = 김용익은 영어로 쓴 작품이라도 스스로 한국어로 번역해 우리나라에서 발표했다. 한국어 소설에는 영어 문장 이면에 담긴 태생적 한국 감성을 제대로 담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한국어로 다시 쓰인 그의 소설은 비슷한 시기 국내 소설의 문장들과는 어딘가 다르다. 영어와 한국어의 묘한 교차. 그리고 여기에서 말미암은 듯한 환상적인 느낌이 있다.

이는 1권에 실린 '꽃신(The Wedding Shoes)'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별안간 비바람이 불던 다음 날, 마을을 둘러싼 네 개의 언덕과 푸른 하늘 사이에 공기는 맑고 풍성하여 꿈꿀 수 있는 그 거리, 농부들이 황금빛 새 짚으로 단장한 마을 초가들은 젊고 매끄럽게 보였다. 우리 집 처마 끝에 집을 짓고 사는 시끄러운 참새들이 수수밭으로 날아가기 전, 이른 아침 아버지는 암소를 사러 부산으로 떠났다." (1권 8쪽)

분명히 지난 시절 우리네 정겨운 시골 풍경을 묘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 몽환적이다. 다음 결혼식 묘사도 비슷하다.

"햅쌀은 났고, 설렁설렁한 바람이 두 사람을 이불 속에 몰아넣을 거요. 잔치 음식은 쉬지 않지, 온 마을 사람은 잔치에 왔다가 달이 훤한 언덕을 넘어 돌아갈 때 장고 같은 배를 두들기며 우리 신랑 신부 잘살라고 노래하겠지." (1권 9쪽)

무엇보다 아래 인용한 단락 중 마지막 문장에 마음이 홀렸다.

"그녀는 발이 부르틀까 봐 흰 버선을 신었는데 학교로 가는 좁은 길에서 나는 가끔 그녀보다 뒤져 가며 꽃신에 담긴 흰 버선발의 오목한 선과 배(木船) 모양으로 된 꽃신을 바라보았다. 그 선은 언제나 달콤한 낮잠을 자고 있는 느낌을 주었다." (1권 14쪽)

'달콤한 낮잠을 자는 느낌'이란 부분에 이르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다.

역시 1권에 실린 '씨값(The Seed Money)'이란 소설에 실린 다음 문장들도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묘사다.

"농부는 논에서 김을 맨다. 일어나 허리를 펼 때마다 새 떼를 쫓는 농부의 고함소리가 산 위에 올려 익어 가는 보리밭이 출렁이는 듯하다. 배고픈 새 떼와 싸우는 허수아비 소리 같은 산울림이 돌아온다." (1권 116∼117쪽)

"노오란 잠자리 한 마리가 송화의 검정 치마에 앉았다가 밀려오는 파도 위로 날아간다. 그처럼 작은 날개로 넓은 바다 위에서 조는 듯 물에 떠 있는 돛단배에서 한밤을 새려고 찾아가는가. 갈매기들이 눈보라처럼 날아내린다." (1권 129쪽)

▲ 통영 김용식김용익기념관. 소설가 김용익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이서후 기자

◇소재와 전개가 영화 같은소설 '푸른 씨앗' = 2권 <푸른 씨앗>에 실린 동명 소설 '푸른 씨앗(Blue in the Seed)'은 다른 소설과 비교해 제법 긴 것으로 김용익이 얼마나 세심하게 이야기 배치를 했는지 잘 보여준다. 푸른 눈을 한 엄마와 아들 천복이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으면서도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내용이다.

"천복이는 이번에야말로 왜 아버지의 검은 눈씨를 닮지 않았나 물어보고 싶었으나 감히 말이 안 나왔다. 그는 잠자코 부엌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어머니를 지켜봤다. 어머니는 밥솥 밑 아궁이 앞에 엎드려 꺼져 가는 불을 후후 불어서 살려 냈다. 촛불 같은 불꽃이 일어나자 어머니는 매운 연기에 몰려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푸른 두 눈이 눈물에 젖어 불빛에 빛나고 있었다." (2권 43쪽)

푸른 씨앗의 문장을 가만히 쫓다 보면 주인공 소년 천복이의 감정이 그대로 나에게 옮겨진다. 지극히 외롭다가 엄청나게 안타깝다가 끝내는 행복해지는 것이다.

"천복이는 뒷도랑으로 가서 손을 씻었다. 젖은 두 손을 저녁 바람에 말리면서 도랑물이 졸졸졸 소리 내며 굽이져 흘러가며 작은 자갈돌들을 남실남실 적시고 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저녁밥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그는 거기에 그렇게 서 있었다." (2권 43쪽)

소설은 다 읽고 나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다. 김용익이기에 가능한 소재와 전개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이 소설을 쓰면서 김용익은 자신의 소설이 마치 '푸른 눈을 한 한국인' 같다고 여긴 것은 아닐까. 이국타향에서도 비현실적인고 비사교적으로 오직 문학만을 탐구했던 자신의 삶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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