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가터 표지판 하나 없이 방치
광복회 경남지부-경남도민일보 공동기획

집~보통학교 등굣길 일부 남아

마산에 남은 김명시의 발자취는 거의 없다. 생가는 도심 광장 조성사업에 완전히 없어져 버렸고, 그 터만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유년기 누볐을 골목길 일부만이 그를 추억할 뿐이다.

최근 시민단체 힘으로 뒤늦게나마 서훈 신청이 이뤄졌다. 명예회복과 동시에 고향에서 그를 기리기 위한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동안 생애 연구나 학술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표지도 없는 생가터 =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 189번지. 오동동문화광장 공영주차장 출입구 앞 골목 부근이 김명시 생가터로 추정된다. 지금은 도로가 난 상태다. 어떤 표지도 없다. 기존 건물은 광장 조성에 따라 2013년 철거된 것으로 알려졌다.

▲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상임고문이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문화광장 인근에 있는 여성독립운동가 김명시 생가터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광장 조성으로 기존 건물은 철거되고 도로가 난 상태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열린사회희망연대 김영만 상임고문은 마산합포구청을 통해 일제강점기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지적도 등본을 보고 김명시 생가터 위치를 확인했다.

성호초등학교(옛 마산공립보통학교)에서 김명시 학적부 등도 살펴보고서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서 등 자료를 만들었다. 지난 9일에는 경남동부보훈지청에 서훈 신청을 했다.

앞서 경남도민일보 '자유로운 광고'에 후손을 찾는다는 알림을 냈다. 서훈 신청을 위해선 가족관계, 호적등본 등이 필요해서다. 하지만 아쉽게도 "영화는 안 만드느냐"는 문의 전화 몇 통만 돌아왔다. 김명시 일가족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친 이후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열린사회희망연대에서는 몇 년 전부터 김명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언젠가는 마산의 인물을 마산에 있는 우리가 기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해방 70주년이던 2015년 말 역사학자 한홍구 초청강연을 열었는데, 그때 또 느꼈다고 한다. 김명시에 대한 서훈 신청은 숙제라고 여겼다. 그러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동안 미뤄둔 숙제를 꺼낸 것이다.

김 상임고문은 "김명시는 무슨 일이든지 의지가 강했고 담대한 여성이었다"며 "마산 사람들이 이처럼 맹렬하게 활동한 여성독립운동가가 있었다는 걸 모르니까 지금 발굴이나 기념사업을 전혀 안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상과 이념을 뛰어넘어 3·15의거, 부마항쟁 등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우리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가 있다"고 덧붙였다.

◇어릴 적 걸었을 등굣길 따라 = 도시전문가인 허정도 박사는 <도시의 얼굴들>(한 도시에 남긴 16인의 흔적)에서 김명시를 한 인물로 다뤘다. 특히 마산에서 열여덟 살까지 산 '소녀 김명시가 이 도시에 남긴 흔적'을 쫓아간다.

과거 주소를 토대로 허 박사는 "원래 창원군 외서면 동성리였는데, (김명시가) 조선의 동성리에서 태어나 식민지 만정(萬町)에서 자란 셈"이라고 했다.

▲ 옛 마산공립보통학교인 창원시 마산합포구 성호초등학교 현재 모습.

588651_448973_5601.jpg
▲ 성호초교동창회 <성호 백년사(1901~2001)>를 보면 김명시(金命時)는 15회(1923년 3월 20일) 졸업생 명단에 있다.
김명시는 마산공립보통학교를 나왔다. 동창회에서 낸 <성호 백년사(1901~2001)>를 보면 15회(1923년 3월 20일) 졸업생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김명시 집에서 학교까지는 대략 700여 m, 소녀 걸음으로 15분 정도의 거리였다." 허 박사는 김명시가 보통학교를 다녔을 당시 창동·오동동 일대 거리와 골목에 관해 그림을 그리듯 설명한다.

"김명시는 동성동 골목에서 빠져나와 공사 중인 불종거리를 건넜다. …… 불종거리를 건너서는 다시 골목으로 들어갔다. 지금의 공영주차장 우측 길이다. 불종거리가 생기기 전까지는 김명시 집 앞길과 한 골목이었던 길이다. …… 조금 걸어나가면 작은 십자로가 나온다. 지금의 공영주차장 북서쪽 모서리 십자로이다. 여기서 보통학교로 가려면 직진 길과 우회전 길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오른쪽으로 틀면 골목길이고 직진해 나가면 넓은 신작로 '창동거리길'이다. 추산동에서 내려와 남성동으로 연결되는 '창동거리길'은 마산포 도심에서 가장 먼저 난 신작로(1912~1915)였다."

마산공립보통학교는 1901년 4월 마산공립소학교로 문을 연 마산 최초 근대식 학교다. "구한말에 시작해 일제강점기를 오롯이 거친, 이 도시에서 가장 뿌리 깊은 학교다. 한국 아이들이 다닌 학교라고 마산 유지들이 건물을 지어주기도 했다. 창신학교만큼은 못했지만 1919년 4월 22일부터 사흘간 교내에서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오빠와 동생 역시 옥살이로 오랫동안 고생했고, 김명시가 고향 마산으로 잠깐이라도 돌아왔다는 기록이나 이야기는 없다고 전해진다.

'만주 벌판과 중국을 누비며 일본군과 총으로 싸운 인물'. 그의 치열했던 투쟁 정신과 민족애는 쓸쓸히 잊혔다.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안타까웠던 생애 마지막 장면으로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지게 된 김명시.

언론인 정운현(국무총리비서실장)도, 역사학자 강만길도 '식민지 시대 고향 마산이 배출한 인물'로 김명시를 꼽았다며 허 박사는 마산 독립운동사에서 우선 재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고문헌

<도시의 얼굴들>(한 도시에 남긴 16인의 흔적), 허정도, 지앤유, 2018

민족문제연구소회보 <민족사랑> 2017년 2월호,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24 '비운의 여장군 김명시', 박광종 선임연구원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