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무장투쟁 최전선 기구했던 삶, 제대로 조명해야
사회주의 계열 '백마 탄 여장군'…자신 포함 오빠·남동생 옥살이
42세 유치장서 비극적 생 마감…시민단체 "당연히 서훈될 것"
광복회 경남지부-경남도민일보 공동기획

마산 출신 여성독립운동가 김명시(金命時·1907~1949)를 취재하기 전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조선의 잔다르크, 백마 탄 여장군, 여걸 중의 여걸….' 이후 자료 조사 중 1932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됐을 때 김명시 사진을 봤다. 당시 25살. 어린 나이인데도 굳게 다문 입과 매서운 눈에서 뭔가 모를 '포스'가 느껴졌다. 1946년 김명시를 인터뷰한 <독립신보> 기자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는가 보다. 기사에 따르면 '크지 않은 키, 검은 얼굴, 야무지고 끝을 매섭게 맺는 말씨, 항시 무엇을 주시하는 눈매, 온몸이 혁명에 젖었고 혁명 그것인 듯 대담해 보였다'고 언급됐다.

▲ 김명시(1907~1949)

◇민족의식 투철했던 독립운동가 가족 = 김명시는 1907년 경남 마산부 만정(萬町·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 189번지에서 태어났다. 현재 기존 건물은 철거된 상태며 그 자리에 오동동 문화광장(2016년)이 조성됐다. 그는 다섯 오누이 중 셋째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고 생선행상을 한 어머니(김인석) 손에서 길러졌다.

김명시 가족은 독립운동가다. 어머니는 마산 3·1 독립운동에 앞장서 만세를 부르다 부상을 당했다. 오 남매 중 삼 남매(김명시·오빠 김형선·남동생 김형윤)는 사회주의 계열 항일투사로 모두 옥살이를 했다. '이는 당시에도 매우 드문 일이어서 마산의 노모가 '구차한 살림살이'를 하고 있다는 보도(1933년 7월 18일 자 동아일보)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야기 지도로 찾아가는 창원의 역사와 문화> 박영주 경남대박물관 비상임연구원 '여장군 김명시와 혁명가 삼남매' 중)

김명시는 1923년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창원 성호초)를 졸업했고 1925년 서울 배화여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학비 부족으로 중퇴했고 그해 10월 고려공산청년회 유학생(21명)으로 선발돼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여자 동기로 창원 출신 김조이도 있었다.

▲ 1933년 9월 26일 동아일보에 실린 '조선공산당 재건사건 조봉암 등 공판개정'에 관한 기사. 맨 왼쪽 위에 김명시 사진이 실렸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7년간의 생지옥 그리고 무장투쟁 = 김명시는 1년 반 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중국으로 떠났다. 이곳에서 조선공산당 재건 책임자인 홍남표(1888~1950)·조봉암(1899~1959)과 함께 중국공산당 상해 한인특별지부 조직 임무를 맡았다. 또 대만·필리핀 등 식민지 상태인 아시아국가 운동가들과 동방피압박민족 반제자동맹을 조직했다.

1930년 5월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한다.

"동만(東滿)폭동이 일어나서 우리는 하르빈(하얼빈) 일본영사관을 치러 갔습니다. (중략) 그다음 나는 인천으로 와서 동무들과 <코뮤니스트>, <태평양노조> 등 비밀 기관지를 발행하다가 메이데이날(5월 1일 노동절) 동지들이 체포당하는 판에 도보로 신의주까지 도망갔었는데 동지 중에 배신자가 생겨서 체포되어 7년 징역을 살았습니다. 스물다섯 살에서 서른두 살까지 나의 젊음이란 완전히 옥중에서 보낸 셈이죠." (1946년 11월 21일 자 독립신보 '여류혁명가를 찾아서' 중)

▲ 1946년 3월 신천지에 실린 김명시 인터뷰 기사 '김명시 여장군의 반생기'.

김명시는 출옥 후 조선의용군(조선독립동맹 산하 군사조직)에 들어갔다. 항일무장투쟁의 최전선이었다.

'제1선 적구는 언제나 목숨을 노리는 첩자가 총을 가지고 뒤따르는 가장 위험한 최전선이란 뜻이다. 김명시는 그곳에서 남자들과 똑같이 총을 쏘고 적진지 바로 밑에 들어가…'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 중)

김명시는 의용군 내 여자부대를 지휘한 여장군이었다. 근데 그는 왜 그냥 여장군이 아닌 '백마 탄' 여장군이라고 불리게 됐을까.

'진짜 백마를 타고 다녔다는 뜻이기보다는 백마가 장군들의 상징이어서 붙었을 것 같다. 중국군은 죽음이 비켜간다는 미신 때문에 백마를 무척 좋아했다. (중략) 김명시를 존경하고 흠모했던 사람들이 붙여준 명예훈장이었을 것이다.'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 중)

◇비극적인 여장군의 최후 = 해방 후 김명시는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이자 서울지부 의장단으로 선출된다. 이후 3년 뒤인 1949년 10월 11일. 그의 자살 소식이 신문에 실렸다.

<경향신문>은 '북로당 정치위원인 김명시는 수일 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부평경찰서에 구속되었었다 하는데 유치된 지 이틀 만에 목을 매어 자살을 하였다 한다. (중략) 감수의 눈을 피하여 유치장벽을 통한 수도 파이프에 자기의 치마를 찢어서 걸어놓고 목을 걸고 앉은 채로 자살한 것이라 한다'고 보도했다.

▲ 1949년 10월 11일 자유신문에 실린 '北勞(북로) 간부 金命時(김명시), 富平署(부평서) 유치장서 자살'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그의 나이 42살.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쳤지만 가장 외롭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오빠 김형선도 1950년 한국전쟁 때 월북하다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동생 김형윤은 일제강점기 말 이후로 흔적이 없다.

김명시에 대해 서훈을 신청한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상임고문은 "여성독립운동가 중 유일하게 '장군'이라고 불릴 만큼 담대했던 분"이라고 평했다. 김 고문은 "1920~30년대 중국 본토와 조선을 왔다갔다했다는 것은 지뢰 몇십 개를 심어놓은 축구장에서 골 넣는 격"이라면서 "(독립에 대한) 신념과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참고문헌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 안재성, 인문서원, 2015

<이야기 지도로 찾아가는 창원의 역사와 문화>, 강인순 외, 바오, 2015

<조선의 딸, 총을 들다>, 정운현, 인문서원,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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