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 주민의 훈훈한 정에 감동
백년전쟁 때 요새였던 몽생미셸
꿈결처럼 아름다운 야경에 매료

프랑스 파리를 출발해 서쪽을 향해 계속 달렸다. 어느새 저 멀리 바다, 영국해협이 보였다. 동해항에서 출발해 3개월을 훌쩍 넘겨 드디어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을 건너 영국해협까지 도착한 것이다. 감회가 새로웠다. 우리가 닿은 해안은 '에트르타'라는 한적한 해안마을이었다. 기암절벽 위 바위의 모습이 마치 코끼리가 코를 바닷속에 담근 모습과 닮아 유명한 곳이다.

▲ 프랑스 에트르타에서 남쪽으로 달리다 바이크를 세웠다. 바이크 너머로 영국과의 백년전쟁에도 함락되지 않았던 요새 몽생미셸이 보인다. /최정환 시민기자

◇친절한 프랑스 아줌마 = 지훈이와 나는 바닷가 공영주차장에 도착해 바이크를 세워두고 헬멧을 오토바이에 대충 걸쳐 놓았다. 그리고 주차장을 나서려는 그때 한 현지인 아주머니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봉주르" 아줌마가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여기도 관광지라 낯선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그런데 오토바이에 헬멧을 그냥 걸쳐놓고 가면 누군가 가져 갈까봐 걱정이 돼서요."

"아 그래요? 그럼 헬멧을 챙겨 갈게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그러지 말고 제가 근처에서 가게를 하니 제가 들고 가서 가게에 보관하고 있을게요. 마음 편히 다니시다 오세요."

"그렇게 불편을 끼쳐도 될까요?"

아줌마는 누군가 헬멧을 가져갈 수 있으니 직접 보관을 해주겠다며 우리 헬멧을 들고 가시면서 명함을 한 장 건네주었다. 근처에서 '딜리시스 억스'라는 브런치 가게를 운영하시는 '나탈리' 씨였다.

지훈이와 얼른 코끼리 바위를 둘러본 후 다시 헬멧을 찾으러 나탈리 씨의 가게로 향했다. 가게가 아담하고 예쁜 곳이었는데 직접 케이크를 만들고 커피를 파는 곳이었다. 우리는 헬멧을 보관해준 게 고마워 커피, 코코아와 초코 케이크를 주문했다. 방금 만든 듯 케이크가 아주 부드럽고 맛있었다. 가게에서 나탈리 씨가 일하시는 걸 구경하고 벽면에 가득한 책들도 구경했다. 가게에서 나오며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나탈리 씨는 돈을 받지 않으시며 그냥 가라고 말했다. 아빠와 아들이 함께 여행을 다니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다며 절대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냥 돌아 나오기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딜 가나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나게 되는 것 같다.

▲ 에트르타 코끼리 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지훈이. /최정환 시민기자

◇외로이 우뚝 솟은 성 = 이번에는 '에트르타'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얼마쯤 달렸을까. 바다 위로 외로이 우뚝 솟은 성이 하나 나타났다. 영국과의 백년전쟁에도 함락되지 않았던 프랑스의 요새 몽생미셸이었다. 처음에 성당이었던 이곳은 프랑스 혁명 때 감옥으로 쓰였으며 현재는 수도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전에 우리나라의 한 항공사 광고에도 몽생미셸이 등장했던 게 기억이 났다. 멀리서도 뚜렷하게 보이는 수도원의 건물이 아주 멋졌다. 가까이서 보기 위해 섬 앞에 조성된 캠핑장에 자리를 잡았다.

몽생미셸은 '대천사 미카엘의 산'을 의미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몽생미셸 앞에는 땅을 메워 만든 주차장과 제방도로가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주차장과 제방도로가 물의 흐름을 막기 때문에 섬이 점점 육지화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것들을 철거하고 친환경적으로 섬을 복원했다. 지금은 섬과 내륙 간 다리가 놓여 오직 무료 셔틀버스만을 타고 통행할 수 있게 됐다.

캠핑장에 짐을 풀어놓고 셔틀버스를 타고 몽생미셸 섬에 들어갔다. 위쪽에는 수도원 건물이, 아래쪽에는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다. 성의 구조는 영화 <반지의 제왕>을 떠올리게 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아랫마을엔 기념품 가게와 식당들이 들어서 있었다. 골목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수도원 입구가 나왔다. 나는 지훈이와 함께 입구에서 한국말이 지원되는 음성안내 기계를 대여해 안으로 들어갔다. 미로와 같은 방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몽생미셸은 야경도 굉장히 아름다웠다. 지훈이는 여기가 너무 좋아 밤에도 찾아가자고 했다.

◇전쟁박물관 = 신비의 섬 몽생미셸에서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펼쳐졌던 유타비치로 이동했다.

제2차 세계대전 프랑스는 당시 독일의 나치정권에 점령됐다. 미국과 영국이 주축이 된 연합군이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이곳 유타비치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펼쳤고 전세를 역전시켰다. 유타비치 전쟁박물관에 들러 전시물들을 둘러보니 그때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본격적으로 연합군이 상륙하기 전 낙하산부대가 먼저 적의 후방에 내려 교란작전을 펼쳤다. 독일 나치정권의 침략에서 프랑스를 구해낼 수 있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시간이 흘러 현재 매년 열리는 기념식에는 당시 적대국이었던 독일의 총리도 참석한다고 한다. 광복을 지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지금까지 남북으로 단절된 우리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유럽은 유럽연합을 만들어 서로의 국경을 없애고 각 나라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나갔다. 아직도 우리나라와 분단관계에 있는 북한, 여전히 과거의 역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등.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슬프게만 느껴졌다.

다시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 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해변의 도시 '툴롱'으로 가기 위해서다. 파리를 포함한 북부지방은 100일 중 80일은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내린다고 한다. 하지만 남부는 그렇지 않고 대개 화창한 날씨가 이어진다고 했다. 프랑스 국립공원 사이로 난 산길에 오랜만에 햇살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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