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꺼이 잠을 잊은 그대

#1 나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아침 일곱 시쯤, 여자 손님이 카페에 들어왔다. 평소에는 한낮에 오는데 오늘은 특별한 방문이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밤을 지새운 모양새였다. 눈동자는 빛나지만 눈 밑이 어두웠다.

허니라떼와 도피오를 함께 주문했다. 분쇄 원두의 향이 났다. 젊은 엄마는 갓 내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미간이 조금 넓어졌다. 그리고 나에게 조곤조곤 이야기한다. "사장님, 어제 예령이가 몇 시에 깬 줄 아세요?" 단골손님의 아기는 새벽 두 시에 깼고, 그녀는 서늘한 달을 밤새워 지켜본 모양이었다. 잠시 뒤 갑자기 옷을 여미고 남편 출근 시간이라며 밖으로 급하게 뛰어나갔다.

나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아니었다. 아내가 온전히 밤을 희생했던 날이 많았다.

하지만 둘째가 태어나니 나의 역할이 늘었다. 연년생에 가까운 두 딸이 함께 깨는 날이면 일이 아주 어려웠다. 파도가 연이어 치는 것처럼 울음이 울음을 불렀고, 잠은 증발했다. 그것은 곤란했고 피곤을 핑계 삼아 의무를 피할 수가 없다. 아내가 온이의 수유를 끝내면 나는 서우가 깨지 않게 그녀를 안고 거실로 나왔다. 일단 트림을 시켜야 했다. 따뜻한 물주머니 같은 그녀의 작은 등을 문질렀다.

▲ 두 아이를 돌보다 둘째와 잠든 나. /정인한 시민기자

#2 내가 먼저 잠들다

때로는 기도를 했었다. '빨리 트림해야지, 온아.' 소화되었다는 신호를 들으면 다음 순서는 재우는 것이었다. 이것이 더 어려웠다. 허리도 아팠고 아이는 커갈수록 무거워졌다. 처음에는 서서 토닥토닥하다가, 나중에는 소파에 그녀를 가슴에 올리고 뒤로 누워서 타닥타닥했다. 하지만 대부분 내가 먼저 잠들어 버렸다.

잠결에 내가 웅얼거리면 작은 생명도 뭐라고 한다. 그녀가 칭얼거리면 내 입은 불수의근이 된다. 뭐라고 하면 나도 중얼거린다. 아마도 "온아, 이제 자야지." 이런 식의 멘트다. 자면서 그게 느껴졌다.

지새우는 것. 고스란히 한숨도 자지 않고 밤을 지내는 것. 이것이 아마 육아의 가장 큰 어려움이 아닐까 한다. 출산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여자의 경우, 더 힘들 것이다. 여기에, 삶에서 오는 또 다른 걱정이 더 해지면, 무거운 우울감이 들기도 한다. 감정은 터져 나오고 자아는 쪼그라든다. 나는 부모가 되어야 할 상황인데 갑자기 아이가 되어버린다. 수많은 어미가 느끼는 것. 그보다 조금 연한 쓴맛을 나는 느껴보았다.

하지만, 운이 좋아서 시간을 두고 커피를 한잔할 수 있을 때, 아기가 쪽잠을 자고, 우리에게 약간의 여유가 생길 때, 새로운 마음이 움튼다.

▲ 품에 안겨 잠든 아이. /정인한 시민기자

#3 어른의 시간, 아이의 시간

내가 아이의 그런 수면 리듬을 탓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아기가 살아가는 것이 원초적으로 옳다. 배고플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깨고 싶을 때 일어나는 것이 태초의 모습이다. 정해진 시간에 움직이는 나의 삶보다 자연스럽다.

긴 잠을 청해야하고, 또 규칙적으로 밥을 먹는 것. 이런 것은 어떻게 보면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세상의 기준이다. 어른의 기준이다. 어른의 시간과 아기의 시간이 다를 뿐이다.

서우와 서온이는 이제 조금 자라서, 긴 잠을 잘 잔다. 올해 일곱 살 된 첫째 딸은 밤중에 오줌이 마려우면 앉아서 나를 조심스럽게 흔든다. 서우는 미안한지 먼저 말을 못 꺼낸다. 나는 "쉬하고 싶어, 딸?"하고 물어본다.

아기의 시간이 끝나고 있음을 느낀다. 요즘은 점점 더 오지 않을 이런 순간이 고맙다. 메마른 어른의 손을 잡은 촉촉한 어린 손이 꿈같다.

딸들은 가까운 미래에 어른의 시간 속에 온전히 편입될 터이다. 고된 낮을 견디고 안온한 밤을 기다리는 삶. 그것을 느낄 때 지난날이 후회된다. 동이 트면 더 따뜻한 아빠가 되어야지 다짐도 한다. 온전한 우주에 나보다 더 가까운 아이를 지키고 싶은 욕심이 든다.

#4 불안한 미래

요즘은 아기를 많이 낳지 않는다. 미래가 불안하고, 스스로 몸을 가누기에도 힘이 들기 때문이다.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서 피임한다. 부모가 되려 하면 자식이 짊어져야 할 짐이 보이기 마련이다. 이 모든 것이 슬프고 두렵다.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아기는 다시 자고, 어른은 새벽달을 보는 것. 다른 시간의 파도가 부딪치는 것. 이런 것이 태초가 현재에 보내는 신호가 아닐까, 하는 상상. 나는 육아의 밤을 통해 더 먼 미래를 계획하기도 하고, 자식이 살아갈 세상을 고민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더 인간다운 생각을 하는 각성제가 된다. 모든 아빠의 마음이라 믿는다.

밀물과 썰물처럼 밤은 가고 새벽이 온다. 그 시간의 파랑 속에서, 아기가 자란다. 어떤 길었던 밤의 경험은 더 오랜 시간을 살아버린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이른 아침에 카페에 오는 사람을 만나면 경외심이 생긴다. 샛별같이 눈이 빛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시간을 살았고 깊어졌다는 증거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고된 육아의 반복과 잠의 부족이 꼭 무기력과 우울로 수렴되지는 않음을 짐작한다.

어느덧 저녁밥이 익어갈 시간이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남자가 종이잔에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그가 길 건너편으로 간다. 흐르는 하천을 보며 커피를 마시는 둥근 등이 보인다. 그것이 보기에 좋다. 마치 가족을 위한 다짐같아서 보름달처럼 계절이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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