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은 낡은 대로 아름답다
야트막한 주택 늘어선 거리…조용히 자리한 담벼락·헛간…아주 오랜 추억 같은 장면들

한우국밥을 한 그릇 먹고 나니 속이 든든합니다. 여기서 국밥 먹으려고 점심까지 걸렀습니다. 함안군 함안면에 있는 한우국밥촌. 매년 벌초나 묘사 때마다 저희 집안 어른들은 이곳에서 국밥을 드시고 헤어지곤 하셨습니다. 국밥집이 세 곳 있는데, 제각각 오랜 역사가 있죠. 요즘에는 백종원이 다녀간 곳에 제일 사람이 많은 것 같네요. 하지만, 입맛이 까칠하지 않은 저는 세 집 다 맛있습니다. 그래서 매번 사람이 제일 적은 식당으로 갑니다.

▲ 한우국밥촌 인근 거리.

국밥집 앞은 제법 너른 광장입니다. 물론 주차장이라 해야 정확하겠지요. 여기도 많이 변했습니다. 예전에 함안군탁로소란 건물이 있었습니다. 탁로소는 노인보호시설입니다. 어릴 적에는 탁아소란 말을 알고 있었기에 노인을 어린아이처럼 잘 보살펴주는 곳인가 보다 했습니다. 지금은 건물 자체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네요. 아마도 근처에 새로 지은 함안면종합복지회관이 그 역할을 이어가지 않나 싶습니다.

어릴 적부터 자주 왔던 곳이지만 국밥집 주변 말고는 다녀본 적이 없습니다. 면사무소 소재지면 으레 있는 오랜 거리가 여기도 있습니다. 재밌어 보여서 언젠가 한 번 둘러봐야지 싶었던 곳입니다.

▲ 함안군 함안면 작은 미용실. 함안면을 걷다보니 오랜 추억의 한 장면 속에 있는 것 같다.

식당 옆으로 난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면 농협하나로마트가 있는 조금 큰 도로가 나옵니다. 근처에 함안면사무소가 있죠. 바로 옆에 천주교마산교구 함안성당 함읍공소가 있습니다. 공소(公所)는 사제가 상주하지 않는 성당을 말합니다. 매번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 보진 못하지만 썩 맘에 드는 곳입니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조립식 단층 건물, 입구 위로 단정하게 세워진 십자가. 언젠가 포르투갈 시골마을에서 봤던 작은 성당과 비슷합니다.

그때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할머니 한 분이 앉아서 묵상을 하고 계셨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역 수많은 거대한 성당이 주는 웅장한 느낌도 좋았지만, 오히려 이렇게 소박한 성당에 앉은 할머니의 뒷모습이 종교의 본질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함읍공소도 겉모습만큼이나 내부도 소박하고 단정했으면 좋겠습니다.

코너를 돌아 지금은 함안대로라 불리는 오랜 거리로 들어섭니다. 슈퍼 앞 평상에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십니다. 한 방향으로 계속 고개를 돌리고 계시는 걸 보니 아마도 버스를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매직으로 나름 예쁘게 적은 버스시간표를 보니 절반은 함안군청 소재지로 가는 노선이고 나머지는 내곡, 주동, 진동, 남마산으로 가네요. 거의 모든 버스가 KTX 함안역에 정차하네요. 아주 가까이 있거든요.

▲ 슈퍼 앞 버스시간표.

분위기를 보니 이 주변이 서촌마을인가 보네요. 야트막한 주택들이 늘어선 거리는 역시 아기자기한 맛이 있습니다. 오래된 슬레이트 지붕이 그대로인 집도 많네요. 오래된 것과 새것의 조화가 묘합니다. 예컨대 이런 것들입니다. 나무기둥이 그대로 드러나는 시멘트 담벼락. 아마도 예전에는 시멘트 대신 지푸라기 섞인 흙이 채워져 있었겠지요? 또, 말끔한 붉은 벽돌 양옥집에 기대 서 있는 낡은 나무 헛간. 이런 풍경은 극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거리를 걸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낡은 것들은 낡아 있는 그대로 참 아름답습니다.

▲ 오래된 것과 새것의 조화가 있는 벽면.

마을이 끝나는 지점부터 주변으로 제법 논밭이 너르게 나타납니다. 논밭 사이로 난 한 길을 따라 쭉 걸어봅니다. 오, 오래된 성이 있다는 안내판이 나오네요. 분산성이라는데, 김해 분성산에 있는 것이랑 이름이 같네요. 지형이 비슷해서일까요? 성의 역사도 거의 가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네요. 가야시대 어느 세력의 근거지가 아니었을까 싶답니다.

▲ 성고개 가는 길.

내친김에 성을 찾아갑니다. 마을 길을 터벅터벅 따라 들어가다 동네를 지나 고개를 하나 넘습니다. 이곳을 성고개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지금은 사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인 것 같아요. 한참을 둘러봐도 성곽 같은 게 보이지 않아서 당황하다가 근처 돼지 사료 공장 같은 데서 일하는 분에게 물어보니 주변이 모두 성터라네요. 그래서 성고개 바로 옆 산등성이를 따라 오르니 돌담 같은 성곽이 보입니다. 그리고 표지판을 하나 발견하는데, 이 주변이 함안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일어난 곳이었네요. 고개 숙여 묵념을 하고 돌아 나옵니다.

아까 지나온 길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버스를 기다리던 할머니는 이제 보이지 않습니다. 함성중학교를 지나니 곧 함안초등학교입니다. 그리고 입구 옆에 함안민속박물관이 있습니다. 고향의 민속문화 보존과 교육을 위해 함안초에서 지은 거랍니다. 와, 여기 재미난 것들이 많네요. 숯을 넣어서 다리는 다리미, 이런 것은 진짜 어릴 적 시골에서만 보던 건데 정말 오랜만이네요.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손농사 도구도 가지런히 전시돼 있습니다. 땅을 매는 도구, 곡식을 터는 도구 등 용도를 잘 구분해 놔서 알아보기도 쉽습니다. 다만, 이걸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직접 사용해 본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 같네요.

▲ 함안민속박물관에 전시된 옛날 등불.

함안군청 소재지가 현재 가야읍이죠.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이곳 함안면이었습니다. 함성중학교 자리가 옛 군청이 있던 곳이지요. 사실 거의 고려시대부터 함안지역 도읍 노릇을 해 온 곳입니다. 함주, 읍성, 읍내 같은 함안면의 오랜 역사는 이제 함성중학교, 함읍우체국, 함읍공소 같은 이름으로만 남아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함안면 거리를 걸으면 아주 오랜 추억 같은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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