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의 독립운동 활약을 소재로 한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고루 이극로 선생의 생애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이극로 선생은 조선어학회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식민지배 하에서 우리 말글을 지키는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선생은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라며 우리 말글을 알아야만 민족이 멸하지 않는다고 주창했다. 말모이를 하고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을 주도하면서 일제에 맞서 우리 말과 글의 규범을 세우는 일에 전력투구했다. 끼니를 거를 정도로 생활은 궁핍했고 일제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선생의 사명감과 의지는 꺾을 수 없었으니 나라와 민족을 수호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다. 민족주의자였던 선생은 해방 직후 좌우 분열을 뛰어넘어 민족의 마음과 몸을 건강히 해야 자주독립국가로 우뚝 설 수 있다며 건민회 활동을 전개한다. 분단의 암운이 감돌던 1948년 봄 김구 선생과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던 선생은 한글학자인 김두봉의 제안으로 북한에 남아 다시 한글운동을 주도한다. 해방 이전인 1933년에 이미 조선어학회는 표준화된 언어체계와 표기법을 세웠는데 선생이 북한에서도 조선어학의 기초를 세워 남북이 70여 년의 분단 상황 속에서도 언어의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선생의 업적은 해방 이후 북에 잔류했다는 이유로 우리 사회에서는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5년 전 정부가 조선어학회 기념탑을 세웠음에도 선생의 공헌은 여전히 분단의 그늘 뒤에 묻혀 있다. 의령군의 평범한 농민의 자손으로 태어나 마산 창신학교에서 민족정신을 키우며 독립운동에 앞장섰지만, 고향 경남과 의령에서도 그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남북한이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데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우리 말글을 통일하는 것이라 하겠다. 선생의 뜻처럼 민족은 하나요, 언어적 동질성을 회복하는 것은 민족자주 독립운동의 연장선에 서는 일이다. 의령과 경남에서부터 우리 말글 통일의 새 역사가 쓰일 수 있기를 바란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