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지역 청년들의 숲이자 배경인 '어른'
자신 드러내지 않고 타인의 고통 돌보는

선생은 나라 밖을 나가신 적이 없다. 도계를 벗어나는 일도 별로 없다. 보아하니 토요일엔 손주들과 더러 외식하는 눈치고 일요일엔 거의 등산을 하신다. 점심시간 1시간 남짓 비우는 것 외엔 한약방을 벗어나지 않는 복무태세다. 환자와의 시간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일 외박이란 엄두를 내지 않는 터, 해외여행은 물론이고 국토기행도 여러 날은 애당초 예정하지 않는 것이다.

2005년 딱 한 번 4박 5일이던가 약방을 비운 적이 있는데 북한엘 다녀오셨다. 6·25 때 전사했다고 수십 년 제사를 지내오던 장형이 살아있다는 연락을 받고 이산가족단과 함께 평양엘 다녀온 것이다.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히 앉아 순서를 기다리던 약방 풍경은 이미 옛날 말. 한참을 앉아 있어도 이따금 '약 찾으러' 오는 사람이 두엇 있을 뿐, 마치 퇴락한 종가의 사랑 같다. 그럼에도 선생께선 여전히 흰 와이셔츠에 단정한 넥타이 차림으로 그 자리를 지킬 뿐이다.

지난주 수요일. 진주 경남과기대 100주년기념관 아트홀에 하나둘 모인 사람은 120명가량이었다. 선생께서 워낙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고 공치사는 더더욱 질색하니 자리 만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나 이리 차일피일 미루다간 후회하겠다는 생각에 몇 사람이 모여 서두른 것이다. 행여 그 어른 귀에 들어가면 무산이 필연이라 그 시각까지 쉬쉬하며 만든 자리다. 행사는 1·2부로 나눴는데 그이가 참석하는 2부에선 일체의 찬양 조(!) 발언과 행위를 금하고 오직 생일축하에 열중키로 했다.

1부에서 행사 취지를 나는 이렇게 읽었다.

"1973년 진주. 장대동 주차장 가에 작은 한약방 하나가 문을 열었습니다. 약관의 나이에 한약사가 되어 사천 '석거리'에서 크게 이름을 얻은 청년 김장하 선생이 '남성당한약방'을 차린 것입니다. 그날 그이가 온 이래 진주는 전보다 훨씬 좋은 동네가 되었습니다.

그이는 아픈 사람에게 약을 줘 번 돈으로 가난한 아이들의 학비를 감당했습니다. 그걸 시작으로 학교를 짓고, 환경 생태 운동에 앞장서고, 시민단체의 약진을 돕고, 시민신문을 후원하고, 가난한 문화예술인들의 뒷배가 되고, 인권 문제에 힘을 기울이고, 장학재단을 만들고, 문화연구소를 만들고, '정치'를 제외한 진주의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물심양면으로 헌신했습니다.

그러구러 그이는 오랜 시간 진주 청년의 배경이 되고 숲이 되어 왔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을 이루고 그것을 공동의 선이란 끈으로 이어나가는 것을 '연대'라 한다면 그이는 우리랑 가장 여물게 연대해온 셈입니다. '진주정신'이란 게 만약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막연한 추상을 걷어내고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현물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그분이 삶으로 체현하며 우리에게 보여준 바로 그것을 일컬어도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이도 이제 허리 굽고 굼뜬 몸피의 노인이 되셨습니다. 되돌아보면 우리는 한 번도 그분에게 제대로 고마움을 표한 적이 없습니다. 더 늦기 전에 그이와 따뜻한 시간을 갖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동시대에 그분과 이어져 있었음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홍창신.jpg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이리 칭송함을 탓할지 모르나 선생은 휘둘러 사방을 봐도 어른이 귀한 우리 세태의 '뽄'이다. 진주에는 남강과 촉석루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명의 가르침을 바탕에 두고 쉬 순치되지 않는 반골적 기질을 보여준 역사와 함께 그이가 '진주정신'을 써내려가고 있다. 우리는 진정 그이가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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