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고 우리말 지킨 독립운동가
의령 지정면 출신 한글학자
영화 〈말모이〉 실제 주인공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초
〈조선말 큰사전〉 기틀 마련

지난 9일 개봉한 영화 <말모이>는 관람객 222만여 명을 끌어모으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영화 속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 실제 모델은 의령 출신 고루 이극로(1893~1978) 선생입니다. 일제강점기 한글운동을 펼치며 독립운동을 한 선생은 해방 후 북에 남았다는 이유로 외면받아 왔습니다. 한글운동에 몸바친 선생의 뜻과 활동이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뜻 깊은 올해 제대로 조명받게 하고자 2편에 걸쳐 기획보도합니다.

▲ 조선어학회 시절 이극로 박사 가족사진. 가운데가 이 박사와 아내 김공순 여사다. /이극로 박사 기념사업회

◇창신학교서 민족운동 싹 틔워 = 이극로 선생은 1893년 8월 28일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선생은 가난한 가정에서 글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했다. 낮에는 소먹이고 밭에 나가 김매고 산에서 나무하는 일을 도왔다.

밭 근처에 두남재라는 서당이 있었다. 김을 매다가 학동들이 점심을 먹으러 간 틈을 타 서당에서 글을 쓰곤 했다. 틈틈이 글을 익힌 선생은 대한제국 말엽에 나온 <대한매일신보>를 읽으며 세상 소식을 접했다. 선생은 18살이 되던 해이자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1910년 음력 정월보름 집을 떠나려다 둘째 형에게 잡혀 다시 돌아왔지만 3개월 뒤인 4월 다시 집을 나왔다.

향한 곳은 마산이었다. 선생은 창신학교에 입학해 보통과 1년, 고등과 1년 등 2년을 다니며 신학문을 배웠다. 학교를 다니는 일은 치열했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학비를 마련하고자 약봉지를 팔러 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선생은 창신학교서 민족운동의 씨앗을 싹틔웠다. 선생은 근대 국학자이면서 독립활동가였던 자산 안확(1886~1946)에게서 역사와 우리말을 배웠다. 조선어연구회 창립 위원이었던 김윤경(1894~1969)과 조선어사전 편찬에 큰 힘을 보탠 이윤재(1888~1943)가 창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뒷날 조선어학회의 주축이 된 이들은 '창신학교'를 매개로 인연을 맺었다.

▲ 이 박사 말년 모습. /이극로 박사 기념사업회

◇<조선말 큰사전> 편찬 긴 여정 = 이극로 선생이 한글운동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한 건 중국·유럽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29년이었다. 그해 4월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며 한글맞춤법 통일·표준어 사정·외래어 표기법 제정 및 <조선말 큰사전> 편찬 여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한글운동에 한평생 바치기로 마음을 먹은 건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오기 한 해 전이었다.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영국 런던대학에서 연구생을 마친 선생은 1928년 6월 아일랜드 문부성을 방문해 그 나라 국어교육 현황을 조사했다. 아일랜드인들이 모국어 대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간판·도로표지 등이 영어로 표기돼 있는 걸 본 선생은 우리말과 글도 이 같은 신세로 전락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한 선생은 조선어사전편찬회를 꾸렸다. 1931년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어문규범을 통일하는 작업에 들어가자 선생은 밤낮으로 한글운동에 매진했다. 민중에게 한글을 보급하고자 동지들과 한글 강습회·토론회를 열고, 한글날 기념회 등에도 참여했다.

선생은 동지들과 한글맞춤법을 통일하고 표준어를 정했다. 외래어 표기법도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말 어휘 16만 개가 정리된 '말모이'(국어사전) 편찬 작업은 1942년 10월 일제가 저지른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중단됐다. 선생은 투옥된 학회 회원 33명 중 가장 무거운 징역 6년형을 받았는데, 함흥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았다.

얼마 후 일제가 압수한 사전 초고가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발견됐다. 2만 6500여 장 분량이었다. 학회는 이를 바탕으로 1947년 <조선말 큰사전> 1권을 펴냈다. 민족의 얼이 녹아든 말모이는 시작한 지 28년 기나긴 여정 끝에 1957년 10월 9일 완간됐다. 총 6권 3558쪽.

◇"민족은 하나, 조국도 하나다" = 선생은 1948년 4월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차 김구 선생과 함께 평양에 갔다가 북한에 남았다. 선생은 북한에서도 한글 연구를 주도하며 1966년 이후 본격화된 '문화어운동'을 이끌었고, 북한 조선어학의 기초를 만들었다.

선생이 북한에 남은 데에는 북의 정치가이자 한글학자인 김두봉의 제안이 있었다. 남쪽에는 한글맞춤법·표준어·철자법 등이 정리돼 있었지만 북에는 그 같은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선생은 북에 남아 문화어운동을 이끌었다.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때 그가 한 이야기다. "우리 민족은 하나며 우리 조국도 하나다. 우리 민족은 통일독립을 요구한다." 선생은 1978년 86세를 일기로 별세했으며, 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있다.

※참고문헌 :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이극로 평전>(박용규, 2005) <도시의 얼굴들>(허정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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