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간 콘서트장에서 눈물
엄마라는 이름 얻은 뒤 포기했던

좋아하는 아이돌 콘서트에 다녀왔다. 5시간을 달려 넓은 공연장에 발을 디뎠다. 광장에 휘날리는 콘서트 현수막을 보니 마음이 울렁였다. 여기에 오는 데 5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네 시간 가까이 진행된 콘서트를 서서 보면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한순간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좋은 걸 이제야 보다니….

나는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조용히 울었다. 처음에는 좋아서 울었고, 후에는 회한이 밀려왔다. 어쩔 수 없이 콘서트 관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숱한 날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임신·출산·육아의 정점에 있을 때마다 콘서트가 열렸다. 게다가 장소는 대부분 서울. 지방에 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단 한 번, 가까이 부산에서 좋아하는 아이돌의 콘서트가 열린 적이 있었다. 절호의 기회이지만 당시 뱃속에는 쌍둥이가 자라고 있었다. 임신 6개월에 접어든 나는 누가 봐도 만삭으로 보일 만큼 배가 불렀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배가 뭉치는데 콘서트는 올 스탠딩이었다. 서서 공연을 보다 앞뒤 사람에게 밀려 배에 압박이 가해지는 상상을 하니 끔찍했다. 그 자리에서 아이를 낳아도 좋다는 결연한 각오가 필요했다. 쌍둥이 임신 6개월의 임부는 눈물을 머금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아이 셋 낳고 날개옷을 찾아 하늘로 떠난 선녀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이 셋을 낳고 기르고 나서야만 콘서트장에 들어설 수 있어.

기회는 다시 삼 년이 지나 찾아왔다. 우리 부부는 최근 약속한 것이 있었다. 돌아가며 서로에게 휴가를 주자는 것이다. 첫 타자는 나였다. 서울행 그리고 콘서트를 말했다. 남편은 당했다는 듯 쓰게 웃었다. 사려 깊은 나는 떠나기 전까지 철저히 준비했다. 미역국을 한 냄비 가득 끓여두고 냉장고에 귤과 사과도 쟁여놨다. 하지만 나의 노력만으로 콘서트를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유자녀 기혼여성이 콘서트에 가기 위해선 필요충분조건이 있었다.

첫째, 아이들이 아파선 안 된다. 갑자기 열이 나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모든 일정이 올스톱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 육아 파트너의 협조가 필요하다. 콘서트에 간다고 하니 다들 그럼 애는 누가 보냐 난리다. '남편이 허락했냐'는 말까지 나온다. "허락은 무슨, 협조겠지"라고 대꾸했다. 내가 없는 동안 남편은 키즈 카페와 시어머니 찬스를 적절히 사용했다. 부차적으로 원고 마감기한이 있다. 프리랜서인 나는 한 달 전부터 부지런을 떨어야 했다. 이렇게 운과 노력이 더해져야만 1박 2일의 외박이 가능해진다.

짧은 기간이지만, 3년 만에 혼자서 떠나는 여행이었다. 마냥 기쁘기만 할 줄 알았는데 마음 쓰이는 곳이 많았다. 엉엉 울며 빨리 오라는 딸의 목소리를 듣곤 체해서 결국 먹은 것을 다 토했다. 우여곡절 끝에 공연장에 입장해선 무슨 힘이 솟구쳤는지 폴짝폴짝 뛰고 떼창을 했다. 콘서트에 오기 위해 거쳤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마음고생이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엄마라는 이름을 얻고 나는 삼 남매의 행복에 좀 더 기울어진 삶을 살았다. 나의 기쁨은 우선순위에서 자연스럽게 밀려났다. 어쩌다가 이렇게 내 기쁨에 인색한 사람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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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오는 버스에서 1박 2일의 좋았던 순간들을 기록했다. 당연히 포기해야 하는 줄 알았던 기쁨을 이제는 꽉 움켜쥐겠다는 다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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