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 내세우지 않은 채 평생 나눔
한약방 성업에도 사치 멀리
시민운동·장학사업 등 앞장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습니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핍니다."

김장하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의 말이다. 이 말대로 그는 평생 나눔을 실천해왔다. 100억 원이 넘는 사재를 들여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해 키운 후 무상으로 국가에 헌납했던 일도 그렇고, 진주지역의 각종 문화예술단체나 언론·역사·환경운동 등 시민사회 전 영역에 걸쳐 지원을 해왔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와 진주문화연구소는 직접 설립에 앞장섰고,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장학사업도 꾸준히 해왔다. 문형배 부산고법 부장판사도 그 장학생 중 한 명이다.

20190118_main2.jpg
▲ 자신의 깜짝 생일잔치에서 활짝 웃는 김장하 이사장. /유근종

지금은 폐간됐지만 시민주주언론으로 창간된 <진주신문〉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폐간 당시 마지막 이사회의 일원으로 참석했던 이철조(건축사) 씨는 "당시 정산을 해봤더니 무려 10억 원에 이르는 운영자금이 김장하 이사장에게서 지원된 것이었다"며 "그래서 일부라도 돌려드려야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일언지하에 '받으려고 준 돈이 아니다'며 손사래를 쳤다"고 회고했다.

1991년 8월 명신고등학교를 헌납한 후 열린 이사장 퇴임식에서 그는 나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배우지 못한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1944년 경남 사천의 지독히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중학교도 간신히 졸업했다. 친구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 그는 삼천포의 한 한약방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틈틈이 공부해 19세에 최연소의 나이로 한약종상 면허시험에 합격했다.

1963년 사천 용현면 석거리에서 한약방을 열었고, 명의라는 소문이 나면서 전국 각처에서 그에게 약을 지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1973년 진주시 동성동으로 남성당한약방을 옮겼고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당연히 재물도 쌓였다. 그러나 그는 평생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았고 사치를 멀리했다. 웬만한 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고, 먼 곳은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집도 따로 없다. 한약방 건물 3층이 집이다. 명신고등학교 이사장으로 있던 당시 전교조 해직사태가 터졌으나 정부의 압력에도 단 한 명의 교사를 자르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또한 자신을 내세우는 일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래서 지금껏 단 한 번도 언론과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나는 지난 2016년 그의 이야기를 한 대목으로 다룬 <별난 사람 별난 인생>(도서출판 피플파워)를 출간한 후 인사차 그를 찾아뵌 적이 있다. 독서를 많이 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많이 부족하니까 많이 읽을 수밖에."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