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 숱한 구분짓기, 대부분 경계 모호
'마음 드론'더 자주 띄워 눈 넓혀야겠다

그림 제목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검푸른 점들만 가득하다. 좌우사방 구분이 없다. 계속 보니 짙고 연한 정도가 눈에 들어온다. 경계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다. 다가가서 보니 점 둘레에 번진 선들도 있구나. 다시 물러서서 보니 그저 어디로 흘러가는지 분간되지 않는 짙고 옅은 푸른 점들만이 화폭 가득 차 있을 뿐이다. 경계는 분명하지도 않고 구분이 되지 않는다.

김해문화의 전당 윤슬미술관에서 진행된 김환기 작가의 그림전에서 만났다. 그림의 제목이 낯익었다. 김광섭 시인의 시 '저녁에'의 구절을 제목으로 붙인 작품인데, 유심초의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김환기 작가는 추상화가 1세대라고 한다. 신안 앞바다에 섬을 두 개나 가진 부자 부모 덕택에 서울 유학생활에서 평생 업인 그림을 만나고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파리와 뉴욕에서의 생활과 경험은 실험적인 미술들을 하게 했고 70년부터 김환기의 캔버스는 전체가 점들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점으로 표현한 전면화(all over painting)다.

고향의 산과 바다, 달, 구름을 선명하게 경계까지 넣어 그리던 그림들이 왜 화면 가득 점화로 바뀌었을까. 도대체 작가는 온종일 점 몇 개를 찍고 잠이 들었을지 궁금하다. 부러울 것 없고 화려한 시간을 넘어서 단순하게 점만을 찍고 주변을 사각으로 둘러싸는 작업의 연속은 키 180㎝가 넘는 장신의 작가에게 수도승의 고행같은 것이었으리라. 즐거운 기분으로 찍은 점, 슬퍼하며 찍은 점, 고향 앞바다의 섬들을 생각하며 찍은 점, 가을하늘을 그리며 찍은 점, 가야 할 날을 생각하며 찍은 점, 점, 점…. 그의 즐거움인 동시에 고행인 듯한 이 그림, 보는 이에게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드니 명작으로 평가받나 보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사별하고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아빠가 하소연한 글을 본 적 있다. 이른바 '싱글대디'인데 '싱글맘 카페'에 가입하려니 엄마가 아니어서, 아빠여서 안된다는 거다.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와 아빠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선 여자와 남자라는 생물학적 차이는 있지만, 역할로 접근한다면 '싱글대디'와 '싱글맘'은 경계가 흐릿하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는 점에서 그렇다. 댓글 분위기는 단호하다. 싱글대디 카페가 있으니 거기로 가라거나 차라리 새 카페를 만드는 것은 어떠냐고 조언한다. 물론, 그렇게 말하며 거부하는 명분은 있을 것이다. 남자가 읽으면 기분이 나쁠 이야기도 있을 수 있고 여자인 엄마만 알아야 하는 것들, 이성과 공유하기에 힘든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고 나누려는 목적인 아빠가 홀로 된 엄마들만 모인 카페에 끼칠 해악이 어떤 것일까. 가슴이 철렁한다. 차이와 차별로 힘들었던 사람들이, 차별의 경계를 넘으려고 온 힘을 기울였고 지금도 진행 중인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단단해진 상처를 무기로 경계를 넘어오려는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 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 삶 속에는 수많은 구분과 차이가 있다. 여자와 남자, 엄마와 아빠, 늙은이와 젊은이, 원주민과 이주민,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 남과 북…. 하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경계가 모호한 게 대부분이다. 필요 때문에 만들어진 것도 있다. 만든 것이라면 이익만 주어야 할 것 같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 그것 때문에 아픈 사람도 있다면 어떨까. 그것 때문에 우리 사회가 균형감각을 잃고 비틀거린다면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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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그 경계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눈을 키운다면 달라질 수 있다. 마음의 드론을 더 자주 띄워 오르고 내려야 할 것 같다. 전체를 보고 동시에 부분을 읽으며 경계에 더 자주 마음을 둬 보자. 김환기 작가의 그림을 보듯이 말이다. 당신은 우리의 삶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 확신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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