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 만세시위 군중 선두에 섰던 기생
통영 독립운동사 잊힌 인물
이소선·정막래 판결문 남아…애국기생 면모 엿볼 수 있어…거사장소 등 흔적없어 아쉬움
광복회 경남지부-경남도민일보 공동기획

통영시 항남동. 일제강점기 길야정(吉野町)으로 불린 곳이다. 일본식 이름이라고 해서 해방 이후 고쳤다.

당시 통영군 통영면 길야정에는 기생조합소(妓生組合所)가 있었다. 1919년 4월 2일 오전 10시 무렵, 기생 7명이 이곳에서 '기생단(妓生團)'을 조직한다. 이소선(李小先·1900~?)과 정막래(丁莫來·1899~1976)는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판결문에 오롯이 남은 행적 = 2016년 국가기록원은 일제강점기 여성독립운동가 판결문과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를 정리해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3·1운동편)>를 발간한 바 있다. 여기에 이소선·정막래 판결문도 실렸다.

판결문을 보면 이소선·정막래는 미리 조선독립 시위운동을 계획하고서 다른 기생 5명을 불러 함께 행동할 것을 권했다. 특히 정막래는 가지고 있던 금반지를 맡겨 그 돈으로 상중에 입는 옷(소복)과 핀, 짚신을 사서 동료에게 나눠줬다. 같은 옷차림을 한 기생들은 4월 2일 당일 오후 3시 30분께 통영면 부도정(敷島町·현 통영중앙시장) 시장으로 줄을 서 걷기 시작했다. 이소선·정막래는 경찰 제지에 응하지 않고 선두에 서서 군중 수천 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를 벌였다.

판결문은 일본 순사 3명의 보고서 내용에 따라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시장 원전(原田)상점 부근에서 만세 소리가 일어났으며, 약 3000명 군중이 집결했다. 남자는 모자를, 여자는 치마를 치켜들고 열광적으로 만세를 절규해 소요가 극에 달했다. 기생단 7명은 열광적인 기세로 군중의 최선두에 서서 만세를 불렀다.'

국가기록원은 "3·1운동에 기생들이 참여했다는 사실은 사진 등으로 일부 알려지지만, 판결문으로 재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했다. 같은 해 4월 18일 두 사람은 보안법 위반으로 부산지방법원 통영지청에서 각각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았다. 마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그해 10월 18일 출옥했다. 2008년 이소선·정막래는 뒤늦게 공로를 인정받아 나란히 대통령표창을 받는다.

◇우리가 잊고 지낸 '기생' = 이처럼 기록으로 봐도 이소선·정막래의 독립운동 행적은 분명하다. 이들은 예기조합(藝妓組合) 기생 이국희(李菊姬 또는 李菊嬉), 정홍도(丁紅挑)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그런데 두 사람 얼굴 사진이 아직 없고, 이소선은 사망 연도가 정확히 알려지 있지 않은 점이 안타깝다. 독립만세시위라는 거사를 계획하고 실행했던 장소 또한 분명하게 남아 있지 않다. 지금 항남동 골목과 통영중앙시장 이야기다.

▲ 통영 만세시위 중심지였던 중앙전통시장. 지금은 옛 흔적을 보기 어렵다. /이동욱 기자

특히 통영지역 만세시위가 잇따랐던 부도정 장터는 통영중앙시장으로 변했다. 과거보다 규모가 커지고 각종 건물과 상가가 들어서면서 옛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일제강점기 기생집과 요정이 많았던 청루(靑樓)에서 유래했다는 항남동 청노골목 정도만 당시 생활문화와 풍경을 겨우 더듬어보게 한다.

통영에서는 3월 한 달 동안 개신교 신자, 청년, 학생, 일제 하급행정기관 직원, 재봉업자·포목상·해물상 등 중소상인과 자영업자, 지식인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거나 모의하다가 검거됐다. 이 같은 통영 지역민의 분위기는 4월 2일 절정에 이르렀다. 그 시위 군중에 기생, 어민, 제조업자, 시장 상인 등이 있었다. 빈민이 다수였고, 기층민이 대거 참여한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평가된다.

윤선자 전남대 사학과 교수는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에서 "기생들이 수천 명의 만세운동 물결 속에서 선봉에 섰던 것은 기생들만의 민족적 정서와 함께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 등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며 "3·1운동을 전후하여 기생 중에는 애국기생도 상당히 많았다. 이런 기생을 사상(思想)기생이라 불렀다"고 설명했다.

▲ 1930년대 통영지역 기생. 그 이전 이소선·정막래의 모습을 떠올려볼 수 있다. /연합뉴스(옛 통영시향토역사관)

그러면서 당시 치안 책임자 지바 료(千葉了)가 기록한 '3·1운동 이후 기생들의 상황'도 옮겼다. 고정관념을 깨는 기생의 다른 모습이다. "1919년(3·1운동이 일어난 해) 9월 우리가 처음으로 부임했을 때의 서울 화류계는 술이나 마시고 춤이나 추는 그런 놀아나기만 하는 눈치는 조금도 볼 수 없었다. 약 800명의 이 기생들은 화류계 여자라기보다 독립투사였다. 이 기생들의 빨간 입술에서는 불꽃이 튀기고 놀러 오는 조선청년들의 가슴속에 독립사상을 불러일으켰다. 화류계에 출입하는 조선청년치고 불온한 사상을 가지지 않은 자 없게 되고 서울시내 백여 군데 요정들은 어느덧 불온한 이들의 음모를 위한 소굴로 화하였다."

◇여성이 앞장선 통영 만세시위 = 통영 만세시위에서 여성은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에서 박용옥 전 성신여대 교수(사단법인 3·1여성동지회 명예회장)는 큰 독립만세시위가 펼쳐진 1919년 3월 18일 상황을 전한다. 이때 사전에 유치원 보모 문복숙(文福淑)과 김순이(金順伊)가 태극기 2000매를 직접 그려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일제 형사대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이들은 3월 14일 붙잡혀 각각 6월형을 선고받아 부산형무소에 갇혔다고 한다. 이후 4월 2일 통영장날 기생들이 대규모 시위 맨 앞에 섰다. 기생은 33명, 시위 군중은 4000여 명이 참여한 것으로도 전해진다.

▲ 이소선·정막래 판결문 일부. /국가기록원

이들 여성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기록도 있다. 풍해문화재단연구총서 제3집 <통영의 독립운동> 내용이다.

형리(刑吏)가 문복숙에게 옥중 소감을 써내라고 했다. 문복숙은 지필묵(紙筆墨·종이와 붓과 먹)을 달라고 한 뒤 이렇게 썼다고 한다.

"너희가 태산을 떠다 옮길 수 있을지언정 태산같이 움직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은 따 옮기지 못할 것이다. 또 너희가 강철은 굽힐 수 있을지언정 강철같이 굳은 우리 마음은 굽힐 수 없을 것이다."

이소선(이국희)은 법정에서 판사를 놀라게 했다. 이소선이 판사에게 물었다. "나는 여성으로서 본부와 간부가 있는데 어느 남편을 받들어 섬겨야 여자 도리에 합당하겠습니까?" 판사가 "물론 본부를 섬겨야 옳지!"라고 답했다. 그러자 이소선이 받아쳤다. "우리가 독립운동하는 것은 여자가 본부를 찾아 섬기는 일입니다."

※참고문헌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국가기록원, 2016)

풍해문화재단연구총서 제3집 <통영의 독립운동>(문학박사 조석래,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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