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민족의식 불씨 지핀 기독교 여성
최덕지, 교육·여성운동 적극적…신사참배 거부로 4차례나 구속
같은 혐의로 옥고 치른 조수옥…해방 뒤엔 고아복지 헌신 귀감
광복회 경남지부-경남도민일보 공동기획

기독교는 19세기 말 국내에 유입됐다. 선교사들은 서양 문물을 전파했고 근대 교육·의료 사업을 펼쳤다. 당시 배움의 기회가 적었던 여성에게 근대 교육은 남녀평등·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불씨가 됐다. 부산 일신여학교·마산 의신여학교 학생들이 1919년 독립만세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이유다.

기독교 여성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에도 앞장섰다. 일제는 신사(神社)를 세워 민족적·정신적·종교적 지배를 꾀했다. 하지만 유일신(하느님)을 믿는 기독교 여성은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와 같다며 철저히 거부했다. 통영 출신 최덕지(1901∼1956)·하동 출신 조수옥(1914~2002)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옥고를 치렀다.

▲ 1945년 8월 15일 조국 광복 이틀 후 평양형무소에서 출소한 14명의 성도들. 앞줄 맨 왼쪽이 최덕지, 뒷줄 맨 왼쪽은 조수옥이다. /책 <이 한 목숨 주를 위해>

◇민족적 여성운동에 앞장 = 최덕지는 일찍이 근대 교육을 접했다. 그는 11살 때 호주 선교부가 세운 통영 최초 근대 교육기관인 진명학원에 다녔고 4년 후 마산 의신여학교에 진학했다. 이는 항일 독립의지를 키우는 밑거름이 된다.

최덕지는 남녀평등과 민족독립은 교육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이 한 목숨 주를 위해>(최종규 지음·송성안 엮음)에 관련 일화가 나온다. '최덕지 (진명유치원)교사는 집집마다 방문해 (여자를 학교에 보내는 것을 꺼리는) 부모를 설득했다. "우리나라 독립하려면 알아야 합니다." "여자가 글을 알아 무엇해요." "아닙니다. 앞으로 남녀평등입니다. 배워야만 삽니다."'

그는 1920년대 여성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통영여자청년회, 근우회 통영지회, 통영부인회 등 통영서 조직된 모든 여성단체에는 최덕지가 있었다. 그는 특히 근우회 통영지회 설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근우회 통영지회가 설립될 당시 임시사무소로 자신의 집을 사용했고, 1928년 9월 통영근우회 회장에 선출됐다.

▲ 최덕지(1901~1956). /책 <이 한 목숨 주를 위해>

◇일제의 신사참배에 항거 = 일제는 조선어교육 금지·신사참배·창씨개명 등 민족말살 정책을 폈다. 기독교회도 피해갈 수 없었다. 1938년 조선총독부의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 발표 이후 신사참배 압력은 더 심해졌고 결국 같은 해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이에 최덕지는 "신사참배는 기독교적 정신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전쟁에 찬성하는 것이며 식민지 지배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쳤다. 그는 1940년부터 4차례 구속됐다. 감옥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같은 시기 신사참배 거부로 수감됐던 조수옥도 "유치장 속에 한 번 처넣어지면 인간으로서 살아갈 용기도 자존심도 의욕도 잃고(중략) 신념을 잃어버리기를 기대하며 그토록 더럽게 해 놓았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이후 둘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평양형무소에서 출소했다.

송성안 경남대 교양융합대학 교수는 "최덕지 선생은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신사참배·황성요배·일장기 경례·창씨개명을 철저히 반대했던 강인한 여성이었다"고 평했다. 최덕지의 외손녀 김성근(71)은 <경남도민일보>와의 통화에서 "10살까지 부산에서 외할머니와 같이 살았고 제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엄격한 분이셨다. 제가 거짓말을 하거나 성도들이 남의 이야기를 하면 호되게 꾸짖었다"면서 "젊은 시절 임시정부를 위해 통영 근우회를 조직해 모금했다는 얘기도 들었고 대단한 분"이라고 말했다.

▲ 신사참배 반대 기도회를 마친 최덕지(앞줄 왼쪽에서 둘째)와 성도. /책 <이 한 목숨 주를 위해>

◇고아의 어머니로 = 조수옥은 1938년 진주에 있는 경남여자성경학교를 졸업한 후 전도사로 일했다. 26살이던 1940년 신사참배 반대운동 혐의로 투옥돼 평양형무소에서 4년 10개월 27일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광복과 함께 출옥했다.

조수옥은 이후 평생을 사회복지에 바쳤다. 그는 사재를 털어 1946년 창원 마산합포구 장군동에 아동복지시설 마산인애원(현 마산인애의집)을 세웠다. 부모 잃은 아이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했고 1700여 명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었다. 그가 '고아들의 대모(代母)'라 불리는 이유다. 또 경남종합사회복지관, 청소년복지관 등을 설립해 소외된 이웃에 희망을 줬다.

2002년 제1회 유관순상을 받은 그는 "유관순 열사는 신사참배 거부 운동 이전부터 마음속의 표상으로 삼아온 분"이라며 "여생을 사회에서 더욱 봉사하겠다"고 말했다.

3·1여성동지회가 펴낸 <한국여성독립운동가>에 따르면 "최덕지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민족운동이며 1920년대 민족적 여성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며 "최덕지를 비롯한 항일 기독교 여성들은 일제강점기 기독교인으로서 민족과 여성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참고문헌

<이 한 목숨 주를 위해>(최종규 지음·송성안 엮음, 2016)

풍해문화재단연구총서 제3집 <통영의 독립운동>(문학박사 조석래, 2013)

<한국여성독립운동가>(3·1운동지회, 2018)

학술지 <일제강점기 최덕지의 민족운동: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중심으로>(윤정란 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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