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한 맞배, 당당한 우진각, 화려한 팔작
아름다운 곡선의 한옥지붕사용 목적 따라 양식 달라
맞배와 우진각 합한 팔작궁궐 등 중심건물에 쓰여

◇지붕의 중요성 = 한옥에서 지붕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크다. 차지하는 면적도 클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미를 대표하는 아이템의 하나로 한옥 지붕의 곡선을 이야기한다. 수려한 곡선이 아니더라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의 정전을 보고 사람들이 느끼는 인상의 대부분도 지붕에서 나온다.

지붕은 그 건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타내는 데도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다. 삼국시대에는 기둥 용마루 끝부분을 장식하기 위한 큰 기와(치미)를 이용했다. 조선시대는 특수한 건물의 모서리는 하얀 회로 마감했다(양상도회·樑上塗灰). 이런 시설은 왕실 등 아주 제한적인 건물에만 쓰였는데 기와가 검정에 가까운 색임을 생각하면 하얀색 마무리는 아주 눈에 잘 띄어 누구나 아주 중요한 사람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했다.

종묘(국보 227호) 전경. /문화재청

기능적으로 지붕은 방으로 들이치는 비를 막고 단열 뿐 아니라 안정적으로 건물을 지탱하는 무게중심의 역할도 했다. 한옥은 주춧돌 위로 특별한 장치 없이 기둥이 바로 세워져 상대적으로 불안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에 안정성을 부여하는 게 무거운 지붕이었다. 지붕에 무게를 주기 위해서 지붕의 뼈대인 서까래 위로 평평한 판을 깔고 그 위에 각종 잡다한 흙·나무토막을 얹었다. 평평한 판을 개판이라 하고 그 위를 덮은 나무를 적심, 이 적심들 사이의 틈을 메우면서 지붕을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덮는 흙을 보토라고 한다. 학자들에 따르면 웬만큼 규모가 있는 건물의 보토는 2.5t 트럭 서너 대를 훌쩍 넘어간다고 한다.

개판은 학창시절 담임선생님에게 늘 듣던 "이 반 분위기는 왜 이리 개판이야"에서 말하는 개판이다. 어차피 지붕에서 외부로 노출되는 부분은 기와·용마루·서까래가 전부이기에 이 부재로는 공사과정에서 쓰다 남은 각종 잡부재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기능에만 문제없으면 되니 말이다.

해인사 장경판전(국보 52호). /문화재청

이런 한옥의 지붕구조는 강풍에는 강하지만 지진에는 약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지진에 대해서 크게 걱정한 적이 없어서 지금까지도 이런 형태의 지붕을 유지하고 있지만 일본은 조금 다르다. 지진이 일상적으로 발생한 나라이니 기둥을 보다 튼튼하게 엮고 지붕의 무게를 줄이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우리나라보다 비가 많이 내리는 환경 때문에 지붕의 경사는 더 급하게 변해야만 했다. '무게는 가볍게, 경사는 더 급하게'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본 목조건축의 지붕은 서까래 위로 별도의 지붕을 만든 이중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뼈대인 서까래 위로 작은 기둥을 세워 진짜 지붕을 받치게 한 것이다. 이러면서 각도를 더 잡고 우리나라처럼 지붕과 서까래 사이를 무겁게 채우지 않고 공간을 비워 무게도 줄였다. 그래서 우리나라나 중국에는 집으로 몰래 숨어든 특별한 목적이 있는 사람들은 서까래 아래, 대들보 위에 숨어 있는 사람(양상군자·梁上君子)이 되었고 일본은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숨길 수 있는 서까래 위 공간을 은밀하게 누비고 다니는 사람(닌자·忍者)이 되었다.

◇맞배지붕 = 이젠 지붕 모양을 살펴보자. 기본은 장방형 평면에 책을 접어놓은 것 같은 형태다. 맞배지붕이다. 맞배지붕은 두 직사각형이 마주보는 배면 한 줄만 제대로 마무리하면 된다. 하지만 맞배지붕의 옆면(박공·Pediment)은 무방비로 빗물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둥그런 우산은 우리 몸을 360도 가려줄 수 있지만 지붕은 네모나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용마루를 더 바깥쪽으로 늘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용마루 부재는 일반적으로 구할 수 있는 가장 긴 목재였을 것이기에 연장할 수 있는 범위는 거의 없었다. 비를 피하려면 건물의 크기를 줄여야만 했다. 상당히 억울한 상황이다. 그래서 건물의 크기도 유지하고 옆면을 보호하기 위해서 박공부분을 판으로 막아버렸다(풍판). 이 조치는 일단 직접적으로 들이치는 비는 막아줄 수 있었지만 풍판 안쪽이 항상 그늘져있어 새어 들어온 습기를 말리지 못하고 가두고 있어야만 했다. 궁극적인 해결책은 여기에도 처마를 만드는 것이었다.

▲ 함양 개평 한옥마을 민가에 남아 있는 눈썹지붕. 맞배지붕의 측면 아래에 간단한 처마시설을 올렸다. 박공은 별다른 모습 없이 노출되어 중심구조가 그대로 외부에 노출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최형균

◇우진각 지붕 = 그래서 용마루 길이를 줄이고 옆면도 처마를 만들었다. 정면에서 보면 사다리꼴이고 옆에서 보면 삼각형 모양을 한 지붕이 생겨났고 우리는 이런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고 부른다. 네 모서리(우주·隅柱)에 각을 준 지붕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지붕은 만들기가 어려웠다. 맞배지붕에서는 두 개의 큰 사각형이 만나는 용마루 부분만 잘 처리하면 지붕을 만들 수 있었지만 우진각 지붕에서는 네 개의 이음면이 추가로 생겼다. 그리고 이음면을 받쳐줄 새로운 부재(추녀)가 필요했다. 이음면이 늘어났다는 것은 비가 새거나 갈라질 가능성이 늘어나서 보다 정밀한 작업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또 새로운 부재를 구해야 했는데 이미 말했듯이 지붕 경사면은 빨리 빗물을 내리고 처마를 효율적으로 늘이기 위해 곡선이었다. 이 각도에 맞춰 적당히 휘어진 부재를 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이 추녀 길이는 건물의 크기를 사각형의 긴 면을 따라 키울 때는 추가로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짧은 변을 따라 키울 때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계속 길어져야만 했다. 튼튼하고 적당히 휘어진 부재도 찾기 어려운데 길이까지 확보해야 하는 어려움이 더해졌다. 그래서 우진각지붕은 중국에서는 아주 귀한 건물의 지붕으로 사용되었다. 자금성 태화전이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추녀 부재를 찾기가 어려워서인지 폭은 좁아도 되지만 옆으로는 길게 만들어지고, 맞배지붕보다 중요하게 보여야 하는 중요한 건물의 출입문(숭례문·광화문 등)이나 아주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해인사 장경판전)에 주로 이용되었다.

▲ 단일 목조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경회루(국보 224호). 상부는 맞배, 하부는 우진각의 모습을 한 팔작지붕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추녀의 길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크게 발달한 합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합각의 크기를 줄이려면 추녀를 길게 뽑아야 한다. / 문화재청

◇팔작지붕 = 다른 시도도 있었다. 맞배지붕 풍판 아랫부분에 그야말로 살짝 처마만 만들어 붙이기도 했다. 건물벽에 눈썹처럼 솟았다고 해서 눈썹지붕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 방안 역시 미봉책에 불과했다. 최종적인 모습은 맞배지붕과 우진각지붕을 합치는 것이다. 맞배지붕은 가장 만들기 편했고, 우진각지붕은 건물의 네 면 모두를 처마로 보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박공부분은 맞배지붕을 하면서 완전히 밀폐된 구조를 가져왔고 처마가 필요한 아랫부분만 우진각지붕의 경험을 빌려왔다. 팔작지붕이 등장한 것이다. 게다가 풍판부분을 크게 만들면 상대적으로 추녀의 길이를 줄일 수 있었다. 경회루의 합각부분이 엄청나게 큰 이유도 정방형 건물의 추녀길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한 노력이다. 팔작지붕은 우리나라에서는 궁궐·관청·사찰 등의 중심전각에 주로 사용했다.

그렇다고 해서 맞배·우진각·팔작지붕이 위계를 가지고 있다고 단정할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왕실건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종묘이다. 드라마에서 늘 외치지만 왕이나 신하나 국가적인 일은 '종묘사직'을 걸고 말한다. 그러면 종묘 정전의 지붕은 팔작지붕일까? 아니다 맞배지붕이다. 종묘는 선왕들의 위패를 모신 신성한 공간이기 때문에 단정하고 엄숙한 맞배지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언제나 필요가 결과물을 낳는 것이 정상이지 결과물을 두고 필요를 재단하는 시기는 사회적 탄력이 굳어버린 징표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한옥의 미는 도식적으로 완성형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건축 요소들을 필요에 따라 적절히 활용하는 데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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