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그들의 사랑 연분홍 꽃송이 되어
노을빛 금모래 해변 남녀
놀이로 서로의 마음 확인
갑작스레 거센 파도 덮쳐
처녀 구한 뒤 숨진 총각
눈물에 젖어 꽃으로 승화

노을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모래 밭길을 연인이 손을 잡고 정답게 걷고 있었어요. 시퍼런 파도가 그들의 아름다운 밀어를 시샘이라도 하듯이 해변을 향해 무섭게 철석거리고 있었어요.

"무슨 놀이를 할까? 혹시 물수제비 뜨는 놀이?"

"에구, 자기도 참? 이 거센 파도에 물수제비가 되니?"

처녀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금모래 빛이 반짝이는 모래밭에다 손가락으로 작은 원을 그렸어요. 총각은 처녀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이 그 원 밖에다 원을 그렸어요. 다섯 겹의 원을 그리자, 처녀가 원 그리는 일을 멈추었어요.

▲ /아이클릭아트
처녀는 총각에게 아주 정다운 목소리로 물었어요.

"자기야, 저 원 한가운데에 자기와 나의 이름을 적어봐."

총각이 두 사람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적자 처녀가 그 밖의 원에다 엄마 아빠라고 적었어요. 그러자 총각은 처녀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다음의 원에 형제들이라고 적었어요. 처녀는 다음의 원에다 친척들이라고 적었어요. 총각은 다음 원에다 머뭇거림도 없이 친구들이라고 적었어요.

그 작업을 마치자,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환하게 웃었어요. 서로의 마음이 통한다는 의미의 미소였지요.

"자기야. 만약에 말이야. 나와 자기 부모, 형제, 친척, 친구들이 물에 빠지면 누구를 가장 먼저 구할 거야?"

총각은 처녀의 예기치 않은 질문을 받자, 정신이 얼떨떨하여 어쩔 줄을 몰랐어요. 그때 처녀가 총각에게 정신이 바짝 들도록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자기야, 그 상황에서 의미가 적은, 다시 말해서 좀 잔인하지만 구하고 싶은 손이 늦게 가는 사람부터 지워 보아."

총각은 무척 당황하였어요. 하나같이 귀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그 이름들을 지울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처녀가 뾰로통한 말투로 총각에게 톡 쏘듯 말했어요.

"자기야, 나의 말이 장난 같은 거야. 나는 신중하단 말이야."

총각은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듯이 원 둘레를 서성거리며 한숨을 쉬었어요.

"남자가 용기가 없군. 나는 자기가 그렇게 용기 없는 사람인 줄 몰랐어."

총각은 처녀의 입에서 용기 없는 무능한 사람이란 말이 나오자 무언가 마음속에서 확 치미는 것을 참고 원을 지웠어요.

"친구도 좋지만 일가친척들보다는 못하겠지. 형제들과 친척이 남았구나."

총각은 원을 돌면서 얼굴을 찌푸리고 고민을 했어요. 삼촌, 외삼촌, 고모, 이모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총각 자신을 향해 손짓을 하며 달려드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형제들을 먼저 구해야지."

총각은 형제와 부모의 원을 돌면서 숨이 멎을 것 같았어요.

'아! 이것은 고문이다. 부모도 형제도 모두 피를 나눈 사람들인데.'

총각은 여기까지 와서 멈출 수도 없었어요. 원 밖에서 자신이 하는 일을 유심히 보고 있는 처녀에게 사정을 하고도 싶었지만 그렇게 말할 수도 없었어요.

"에라 모르겠다. 형제들을 먼저 지우자."

총각은 솔직하게 눈물을 머금는 심정으로 형제들의 원을 지웠어요. 형제의 원을 지우고는 총각은 이제 다음 일은 도저히 하고 싶지 않았어요. 총각은 용기를 내어 처녀에게 힘없이 걸어갔어요.

"나 이제 더 이상 할 수 없어. 이런 놀이는 앞으로 하지 말자."

"뭐야? 나 자기가 그렇게 나약하고 용기 없는 사람인 줄 몰랐어."

"원 밖에서 남의 일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과 원 안에서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입장은 달라."

"그러면 내가 들어가서 할까? 자기 말대로 내가 그 고통을 당해볼까?"

총각은 처녀의 그 말에 머리를 흔들며, 눈물 젖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아니, 내가 할게."

총각은 입술을 깨물고 원 안으로 들어갔어요.

'아! 부모와 애인을 두고 누구를 먼저 구하지? 무척이도 잔인한 놀이이다.'

원 밖에서 총각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처녀도 초조했어요. 누구를 먼저 구할까? 누구에게 먼저 손길을 줄까?

총각은 굳게 결심을 한 듯이 연인의 이름을 용감하게 지웠어요.

"연인은 다시 만날 수 있는 연인이 있지만 부모는 한 번 가시면 다시는 모실 수 없는 분이야."

총각은 금모래가 반짝이는 해변가로 달리며 미친듯이 고함을 질렀어요.

"아! 사랑이란 괴로운 것이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처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에 알지 못할 미소를 머금고 혼잣말로 중얼거렸어요.

'역시, 자기는 내가 바라는 사람이야. 오늘 이 자리에서 연인 먼저 살리고 부모를 외면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위선이야. 나는 당신의 착한 본심을 시험한 거야.'

처녀는 그 총각을 따라가며 소리쳤어요.

"자기야, 내가 정말 사랑하고 싶은 연인이야. 합격이야." 미친 듯이 달려가던 총각이 쓰러질 듯이 자리에 퍼질고 앉아 울먹이다 처녀의 외치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어요.

"아, 부모를 먼저 구하는 것이 정답인가?"

총각도 일어나 처녀를 향하여 달려갔어요.

"자기야!"

"그대로 있어. 내가 달려가고 있어."

바로 그때였어요. 집채 같은 어마어마한 파도가 그들을 향해 몰려왔어요.

순간적으로 두 사람은 그 무서운 파도에 휩쓸려 바다로 빨려 들어갔어요.

"으윽."

총각은 그 험한 파도 속에서 처녀를 향해 필사적으로 수영을 해 갔어요. 처녀의 손목이 총각의 손에 잡히자, 총각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처녀를 물 밖으로 밀어내었어요. 숨을 헐떡이며 처녀를 물 밖으로 밀어낸 총각은 힘에 부쳐 파도에 휩싸여 바다로 끌려갔어요.

"자기, 자기야."

처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총각을 향하여 달려갔지만 파도는 총각을 꿀꺽 삼킨 채 성난 사자처럼 '으르렁'거리기만 했어요.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기울고 땅거미가 짙어올 무렵 총각의 시신이 파도에 밀려 바닷가로 나왔어요.

처녀는 총각의 온몸을 쓰다듬으며 울부짖었어요. 처녀의 눈물이 총각의 온몸에 빗물처럼 촉촉이 적셨어요. 처녀가 총각의 시신을 안고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끌어안고 눈물을 그의 얼굴에 흘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어요.

그 시신에서 무지갯빛이 하늘로 벋쳐오르고 신비한 음악 소리가 들렸어요. 그와 동시에 그 시신이 아름다운 꽃송이로 피어나는 것이었어요. 야단스럽지 않은 연분홍으로 꽃잎도 총각의 마음처럼 부드러웠어요.

먼 훗날 사람들은 바닷가의 아름다운 사랑이라 하여 해당화라고 불렀답니다.

처녀는 총각의 무슨 마음을 알아보려고 했나요?

해당화의 꽃말은 '원망', '온화', '미인'이라고 해요. /시민기자 조현술(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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