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도화지 삼아 수채화를 그렸구나
이탈리아 끝자락 비에스테
외계행성인 듯 이국적 정취
창밖 빨래 널린 광경 친근

여행에 관한 한 괴테 또한 딜레탕트(애호가)였다. 아무도 모르게 잠행했던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여행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모험과 도전의 딜레탕트적 관념이 그를 만들어 놓았을 수 있다. 그랬기에 시칠리아행 범선을 타는 것을 두려워했고 결국에는 그 배를 타게 되었으니 여행에 관한 한 확실한 딜레탕트였다.

◇멀미

내가 소렌토의 끝자락 미네르바곶에서 보았던 그 범선을 타고 떠나 간 주인공은 다름 아닌 괴테였다. 1786년 9월 3일 새벽 3시에 카를스바트를 떠난 지 근 7개월 만이다. 사실 괴테는 나폴리에서 시칠리아로 갈지 안 갈지에 대하여 오랫동안 주저하고 결정을 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했었다. 심지어 그런 망설임이 여행 자체를 불안하게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결심을 '해 버렸다'. 문제는 결심의 내용이 아니라 결심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있지 싶다. '해 버리고' 나면 마음이 편하고 그 결심에 만족하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색채 이론의 원리도 바로 검은색과 흰색이 만나는 경계선의 양극 현상에서 시작됐던 것처럼 그의 시칠리아 여행도 그 경계선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인 결과였다.

괴테를 고민에 빠뜨리게 한 것은 항해로 인한 멀미 때문이었다. 인생 여로를 결정하는 것이 그의 예견처럼 그렇게 크고 막중한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촉발한 것은 지난 역사를 현장에서 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일종의 역사관이라고 할까. 시칠리아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향하는 중요한 관문으로서 뺏고 뺏기는 역사가 빈번했던 장소였다.

나폴리에서 비에스테까지의 거리는 200킬로미터 정도다. 대중교통이 원활하지 않아 포자(Foggia)까지 직행버스로 와서 다시 완행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데 모두 다섯 시간 정도가 걸렸다. 이렇게 멀고 교통이 좋지 않을 줄 알았다면 아예 일정에서 제외시켰을 것이라는 후회도 막심했지만 막상 도착해서 본 비에스테는 상상 밖의 동네였다.

비에스테를 들어오는 길목의 산야는 어느 외계의 행성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지금까지 봐 온 이탈리아의 산야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이곳에 우주선 모양의 큰 야영 텐트 몇 동이라도 앉아 있었다면 영락없는 외계 행성에 온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시가지는 석회암으로 산들이 형성되어 있어 눈이 부시도록 하얀 절벽이 아드리아해의 파란 바다와 대조를 이뤄 또 다른 세계였다. 백색의 건물들, 인도까지 하얀 대리석으로 깔려 있어 카프리의 그 하얀색과는 또 다른 감흥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 비에스테 해안변에 솟아오른 석회석 바위, 하나의 산이다. 마치 외계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빨래

이탈리아와 같이 세계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무엇일까? 소위 강대국이라고 하는 나라들과 우리는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이 자주 나에게 질문이 된다. 그만큼 큰 역사의 물결을 헤쳐 나온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그에 따라 생각의 크기가 커진 것 아닐까? 말 그대로 그랜드 디자인을 할 줄 아는 탁월한 정치인이나 실력가가 있었을 것이고.

그런 생각의 크기를 키워 준 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숙달되고 물려받은 것일 수 있다. 고대 로마 시대 때 카르타고와 포에니 전쟁을 치르면서도 로마는 패장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지만 반대로 카르타고는 그 사이에 네 명의 장군을 처형시켰다. 그런 까닭에 전장에서 로마의 장군들은 자기 책임으로 전쟁을 완수할 수 있었으니 큰 생각,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괴테의 말을 빌리자면 견실한 시민이 가장 품위 있고 고귀한 자원이라고 했던가?

방파제를 따라 등대 있는 곳까지 한 참을 걸었다. 아드리아해의 물결이 출렁거렸다. 저 바다 건너편이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그 아래로는 알바니아와 그리스다. 지도에서 보면 이곳 비에스테나 레체(Lecce)와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다. 이 장화의 뒤 발꿈치에 위치한 비에스테는 그곳을 향해 등댓불을 밝힐 것이다. 하나의 항구 불빛이 아니라 이탈리아를 대표한 불빛으로서. 비에스테는 그런 곳이다.

다시 골목길로 들어왔다. 좁은 골목길로 아드리아해의 가을바람이 사면에서 불어와 골목길마다 널어놓은 빨래들을 흔들어 댔다. 이불이며, 양말이며, 속옷까지 바람에 일렁거렸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으면 이 집에 어느 정도의 식구가 사는지, 아이가 있는 집인지, 남정네가 사는 집인지도 대략 알 수 있다.

유독 이탈리아 남부 지방으로 올수록 이런 '빨래 광경'은 더 쉽게 볼 수 있다. 북쪽에서는 그런 것을 본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 날씨가 워낙 좋아 탈수를 하지 않는 습관이 있어서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 첫 여행지였던 볼차노에서는 탈수기가 있어서 빨래를 한 후 탈수를 했었는데 그런 기후의 영향일 수 있다.

▲ 골목마다 걸어놓은 빨래들, 한국에서는 70, 80년대에 유행했었지만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광경이다. 이 광경이 여행자의 마음을 녹였다. 나의 티슈바인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빨래 광경'은 여행자에게는 가슴을 열게 하는 것일 수 있다.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나와 같은 사람이 여기도 사는구나!' 그런 생각으로 더욱 내 가슴 또한 열게 만드니 말이다.

벌써 몇 십 년 전의 얘기지만 군 복무 시절 심부름차 내가 모시던 포대장님 집에 갈 일이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마자 달려와 내게 안기는 아이들과 헝클어진 방을 보며 그 엄했던 포대장님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 심리적 간격이 좁혀졌었던 추억이 있는 것처럼 창밖에 널어놓은 빨래 한 줄이 이처럼 여행자를 멈추게 하고 마음을 열게 할 줄은 그 전에는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동반자

괴테가 부러운 것은 티슈바인이라는 동반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훌륭한 화가였지만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괴테의 의중을 미리 알아채고는 말없이 협력했던 사람이었다. 특히 지금과 같이 사진기가 없었던 시절에 티슈바인은 빠른 스케치로 현장을 기록으로 남기고 그것을 괴테가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를 했었다.

나폴리에서는 화산이 분출하는 상황 속에서도 괴테의 권유에 마다하지 않고 베수비오산 등정에 동행하였는데 그야말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폴리에서 괴테와의 동행을 마치고 크니프라는 나폴리 화가를 추천하여 괴테가 홀로 여행하지 않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괴테에게 티슈바인이 있다면 나에게는 더 많은 동반자가 있으니 이름 하여 창밖에 널어놓은 빨래들이다. 그들이 빗장을 열고 이 도시에서 나와 친구가 되자고 하는 이들이다. 여행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면 내가 느끼는 감흥의 열 배는 더 느낄 것이라는 것을 새삼 절감하게 되지만 그 대신 나를 영접하고 배웅해 주는 저 창밖의 빨래들이 나의 티슈바인이요 친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내일 또 새로운 친구를 만나러 떠난다. 타란토에서 이오니아해의 바람에 춤추는 나의 친구들이 환영해 줄 것이니! /글·사진 조문환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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