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일터의 마에스트로 공장 아닌 공연장으로 뚜벅
기계소리, 화음이라 칭한 시인
날카로운 현실 곳곳에 묻어나

이 시대에 노동시라니. 안주하거나 내몰리거나, 노동은 이미 계급적 지향보다 개인적 지향이 앞서가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했다.

지난 성탄절 서울 목동 열병합발전소 75m 굴뚝에 오른 파인텍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이 409일을 맞으며 기네스북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 기록을 세웠다. 기존 기록 역시 파인텍 차광호 지회장이 2015년 경북 구미에서 굴뚝농성을 했던 408일이었다.

다시, 이 시대에 노동시라니 했다가 고개를 젓고 만다. 계급의식 높은 노동 언어는 갈 곳을 잃었으나 노동자들은 여전히 노동 현장에 있기 때문이다.

▲ 〈내일은 희망이 아니다〉표성배 지음

◇표성배 시집 <내일은 희망이 아니다> = 오랫동안 노동시를 써온 표성배 시인의 새 시집을 들춰보며 이번에도 노동시인가 했다가, 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전위성도, 계급 정체성 확인도 아닌 시들. 그러니까 젊은 시절의 그 단단했던 노동시가 아니면 그에게 무엇이 남아 있을까. 이제 제법 나이가 들어버린 시인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가 찾아낸 것은 솔직함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솔직하게 쓰자.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 그것이 용기다. 먼저 말을 걸고 악수를 하고, 술잔을 부딪치며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이야기하는 그게 노동자들이 쓰는 시다. 현실에 발을 딛고 내일을 꿈꾸는 시, 좀 쉬워야 하지 않을까. 쉽게 읽고 쉽게 느끼고,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는, 그게 노동자가 쓰는 시의 힘이다." (산문 '노동시와 노동 시인' 중에서)

하여, 잔잔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공감이 이번 시집에 담겨 있다.

"이 나이가 되어도// 이 세계를 긍정할 수 없다// 아니, 그렇다고 맞서 부정도 못 한다// 그러고 보면 이건// 긍정과 부정의 문제가 아닌지 모른다// 따지고 물고 늘어지고 해보아도// 우리말 부정과 긍정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가 언제부터// 내 앞에 뒤에 펼쳐져 있다" ('자본주의 2' 중에서)

그렇지만, 시인은 여전히 공장에 있다. 노동 현장에 있는 시인, 그게 그가 쓰는 시의 힘이다.

"기계 돌아가는 부드러운 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하루,// 쿵 - 쿵 - 쿵 - 프레스 소리// 쇠를 갈아내는 그라인더 소리// 땅 - 땅- 땅 - 망치소리// 쇠를 녹여 붙이는 소리// 소리가 어울려 내는 이 화음// 공장에 첫발을 들이던 순간부터 //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거대한 공연장" ('화음' 중에서)

도서출판 삶창, 136쪽, 9000원.

▲ 〈갑과 을〉이규석 지음

◇이규석 시집 <갑과 을> = "두 번째 시집을 묶는다. 첫 시집 이후 11년이나 걸렸다."

첫 페이지 시인의 말부터 탁 마음에 들어온다. 시란 것이 이렇게 쉽게 쓰이지 않아야 좋다고 생각한다. 그만큼이나 무겁고 버거운 운명을 시인은 지고 가야 한다. 한데, 이규석의 시는 어찌하여 이리도 겸손한 것일까. 바쁜 생활 속에서도 문득 가만히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낮은 시선과 맑은 눈을 상상해본다.

"출근하는 아침 하늘/ 구름 한 점 없이 참 맑다// 덩달아 내 마음도 맑아져/ 혹시 오늘 좋은 이 기분처럼/ 일거리가 좀 들어올 것일까 (중략) 전화기도/공장에도/ 찾는 손님 하나 없고/ 며칠 째인지도 모르는 체/ 저 하늘처럼 너무 맑은 공장" ('너무 맑아서' 중에서

"손에 가시가 박혔나 보다/ 따끔따끔 찔러올 땐/ 아찔할 정도로 소스라친다// 너무도 작아서 가물가물/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것이/ 이렇게 맥 못 추게 만드는 걸 보면// 살아오면서 작고 약해 보인다고/ 거만하게 무시한 적은 없었던가"('가시' 중에서)

시인은 아마도 소규모 하청 공장의 노동하는 사장일 테다. 하여 그의 시는 우연히 만난 이 시대 또 하나의 노동시라고도 할 수 있다. 그의 노동은 그의 시선이 머무는 사물에 투사돼 있다.

"어깨 무겁다고/ 슬쩍/ 내려놓을 수도 없는 짐 (중략) 세찬 바람 불고 갈 때마다/ 우우우 속울음 울어도/ 감히 일탈할 수 없는 제자리// 꿋꿋하게 지키고 섰다" ('전봇대' 중에서)

"명퇴 강요당하듯/낯선 곳으로 발령 난 것처럼/ 하루아침에 뿌리뽑혀온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살아왔는데/ 저항할 힘도 없이 엮여서/ 의지대로 살기 어려운 건 현실이고/ 지켜보는 눈들 앞엔 시치미 뚝/ 항상 싱싱하고 활기차게/ 웃는 얼굴로 있어야 할 들러리의 자리" ('가로수' 중에서)

그리고 사물에 투사된 시인의 마음은 더 큰 사회로 확장되며 날카로움을 더한다.

"진실은/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창(窓)이 되고// 거짓은/ 길을 가로막은 벽(壁)이 된다" ('역사교과서' 전문)

도서출판 황금알, 111쪽,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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