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는 여성의 일이라 윽박지르는 사회
성별 분업 못 바꾸는 복지는 힘이 없다

오줌 못 가리는 아이를 새벽에 화장실에 가뒀다가 숨지게 한 엄마가 체포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아이는 셋이고, 사건이 일어날 때 남편은 집에 없었다고 한다. 새벽녘에 남편이 집에 없다면 야간 일을 하고 있었거나 생업이 끝나고도 아직 귀가하지 않은 경우일 텐데, 어느 쪽이든 그 가정은 여성이 '독박육아'를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해 본다.

아동폭력 가해자와 홀로 육아하다 지친 엄마의 거리는 이처럼 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 둘의 거리를 전혀 가깝게 재지 않으며, 포개어질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않는다. 저 사건에서 아동폭력과 홀몸 육아 노동이 무관하지 않을 가능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남편의 부재에도 궁금증을 갖지 않는다. 남편이나 아빠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해 어떤 정보 없이도 "돈 벌러 갔지"라는 응수가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남자가 집에 없음이 곧 돈 벌고 있음과 동일시되는 사회가 주는 메시지는 어마어마하다. 남자는 집에 있으면 안 되는 존재라고 윽박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아이를 둔 여성은 집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 것이다. 아이 아빠는 새벽에 집 밖에 있더라도 의문을 품을 까닭이 없으며, 집에 있다고 해도 쉬거나 잠을 자야 하므로 육아에서 면제되는 존재라는 것. 육아는 여성의 일이요, 돈 버는 것은 남자의 일, 여성은 집 안에 있어야 하고, 남자는 집 밖 사회에 있어야 하고, 여성에게 집은 24시간 노동현장이고, 남자에게 집은 드러눕는 곳이라는 것. 아내는 새벽에도 일어나 육아 노동을 해야 하지만 남편은 아내가 지쳐 잠든 시간에도 육아에서 놓여날 수 있는 곳. 집 안에서 남자에게 역할을 주지 않는 사회. 남자가 부재하는 집. 남성의 육아와 가사가 배제된 집. 여성에게 남자가 지워진 집을 채우도록 요구될 경우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클지 짐작할 수 있지만, 그것은 주목받지 못한다. 끔찍한 범죄자가 된 여성이 아이 셋을 혼자 키우느라 지쳐버린 엄마였을 가능성은 그냥 묻히고 말 것이다.

남자가 돈 버는 노동을 하면 집에서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가 육아나 가사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대접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가사와 육아가 독립적 가치를 가지지 못한 노동으로 치부되는 경향은 이 나라뿐만 아니라 범세계적인 듯하다. 애너벨 크랩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1970년대 이전만 해도 주부가 다치면 주변인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느냐에 따라 가치가 매겨졌다고 한다. 주부가 상해를 입으면 남편에게 보상이 주어지기도 했으며, 주부가 자신의 손실에 대한 보상을 스스로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만들어진 것도 오래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의 경우 이제야 여성가족부에서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를 산출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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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다쳤다고 남편이 보상금을 받는 것은 가사와 육아에 묶인 여성이 궁극적으로 남성에게 묶인 존재임을 말해준다. 돈을 벌지 못하는 노동은 불완전하고 무가치하며 남자의 돈 버는 노동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남자 중에는 자신이 그 끈을 풀 생각을 하기보다 나라가 돌봄 복지에 신경 쓰지 않는다며 엉뚱하게 표적을 겨누는 이들도 있다. 가족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응당 나눠야 할 역할을 대신 메워주기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지 묻고 싶다. 분업화된 성별체계를 바꾸지 못하는 복지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그 바뀌지 않음에 끔찍한 학대 피해자의 발생을 막지 못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분노를,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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