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그냥 걸었어 그리고 추억에 빠졌지
산복도로·광암해수욕장 옛 가야백·한일합섬 터…아련한 향수 불러일으켜

지인이 보내온 책 한 권이 나를 옛 추억에 푹 빠지게 할 줄이야. 김대흥 작가의 <여행자를 위한 도시 인문학>(도서출판 가지, 2018년 11월)은 개인사를 중심으로 한 창원 여행서입니다.

곰곰이 읽다 보니 '아, 그때 그랬지' 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나 옛 마산, 창원, 진해에서 살다가 이제는 다른 곳에 사는 이들에게는 다정한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한 책이죠. 그리고 외지인들에도 훌륭한 도시 여행안내서 노릇을 합니다. 책에서 소개한 곳을 돌아다니며 풍경에 담긴 오랜 의미를 음미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동경과 설렘을 안겨주던 산복도로

1년에 한두 번은 버스를 타고 고운로를 지납니다. 경남대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다 보면 더러 이곳을 지나는 차가 있거든요. 이 도로가 마산의 원조 산복도로입니다. 제일여고 앞을 지나면서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마산 도심과 앞바다 풍경에는 다른 장소에서 느낄 수 없는 그윽함이 담겨 있습니다.

"고3 시절 오후 4시가 되면 교실 창밖을 바라봤다. 그전엔 파란 색깔이던 바다가 4시가 되면 검붉은 색으로 변했다. 그 시간 거제 쪽에서 여객선들이 들어오면 흰 선이 생기면서 물길이 갈라진다. 오후 4시는 굉장히 감성적인 시간이었다." (21쪽)

마산중앙고 교실에서 바라본 마산 앞바다 풍경을 묘사한 내용입니다. 생각만 해도 멋지네요. 근데 지금은 마산해양신도시 매립지가 바다를 가려 이 멋진 풍경은 보기 어렵습니다.

▲ 마산 원조 산복도로인 고운로와 그 너머 마산 도심과 앞바다 풍경. /이서후 기자

고운로는 학교 밀집 지역이죠. 마산에서 초중고를 나왔지만 이 도로에 있는 학교를 한 번도 다니지 못한 저로서는 항상 부러운 등하굣길이기도 했습니다.

"평지를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90도로 방향을 꺾은 뒤 산 쪽으로 달리기 시작하면 외지 사람들은 아주 신기해한다. 이 버스는 학교 밀집 구간을 지나는데 마산중, 마산고, 완월초, 성지여중, 성지여고, 마산여고, 마산중앙고, 마산제일여고 앞에 모두 서거나 스친다. 그래서 등하굣길에 산복도로를 달리는 버스를 타면 각종 교복과 배지를 단 학생들이 뒤엉켜 마치 학생복 패션쇼를 보는 듯했다." (21쪽)

◇그 시절 맑은 바다는 어디로 갔나

학창시절 형들을 따라 몇 번 가포유원지를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예쁜 카페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귀산동 해안도로 카페 거리 정도였을 겁니다. 그런데 가포유원지가 전국적으로 유명한 해수욕장이었다는 건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마산 도심에서 아주 가까운 가포는 1960~70년대 남해안을 대표하는 해수욕장이었다. 부산 해운대, 강릉 경포대와 함께 소개되곤 했으며 해운대에 10만 인파가 몰릴 때 가포를 찾는 관광객도 5만 명은 되었다. 여름이면 가포해수욕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서울-마산을 잇는 직통 피서 열차가 운행되었을 정도다." (46쪽)

마산 바다가 굉장히 맑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이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책에는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가포해수욕장에 깜짝 등장했다는 기사도 소개돼 있습니다. 하지만, 영광은 1970년대까지였습니다. 1979년 마산 앞바다는 전국 최초로 어패류 채취 금지구역으로 지정됩니다. 1970년대 만들어진 창원과 마산 산업단지에서 나온 폐수가 그대로 마산 앞바다로 흘러들었거든요. 다행히 지난해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광암해수욕장의 부활로 어렴풋하게나마 마산 바다의 옛 명성을 추억할 수는 있게 되었습니다.

▲ 2018년 새롭게 단장하여 개장한 진동면 광암해수욕장. /이서후 기자

◇아, 정다운 그 이름 성안백화점, 가야백화점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합포초등학교 정문에서 나와 도로를 대각선으로 마주 보는 자리에 낡고 커다란 가야빌딩이 있습니다. 이 건물이 1977년 12월 마산에 제일 처음 생긴 가야백화점이었습니다.

"지하 1층, 지상 8층으로 대로변에 들어선 가야백화점은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당시 백화점 측은 초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경남북 최초이며 국내 현존 3대 백화점에 버금가는 대형 종합백화점이라고 광고했다. (중략) 80년대 들어서는 성안백화점, 로얄백화점, 한성백화점, 동성백화점 등 백화점들이 경쟁적으로 문을 열었다. (중략) 실적 면에서 마산 사람들의 코를 우쭐하게 한 건 성안백화점이었다. (중략) 개점 이듬해인 1989년 매출 350억 원으로 전국 24위에 올랐다." (82~84쪽)

가야백화점, 성안백화점, 로얄백화점 같은 이름을 다시 들으니 정겹네요. 성안백화점은 옆에 롤러스케이트장이 있어 겸사겸사 자주 가던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신세계백화점이 되었지요.

◇많은 사람이 떠난 자리 다시 많은 사람이 모이다

"한일합섬 엄청 컸지. 직원도 많았다. 그 당시 직원들은 다 걸어서 다녔다. 간부들은 자전거나 오토바이 타고 다녔고 자가용 탄 사람은 없었다. 직원들은 출퇴근 때는 사복을 입고 다녔다. 섬유가 잘 될 때니까 한일합섬 다닌다고 하면 아주 좋은 직장 다닌다 생각했다. 출퇴근할 때 직원들이 경비원에게 인사하고 경비들이 따라서 인사하던 풍경이 생생하다." (30쪽)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한일합섬은 한창 가동 중이었습니다. 이른 아침 등굣길에 한일합섬 기숙사 쪽으로 지나가면 밤새 일을 한 여공들이 우르르 공장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 바로 옆에 있는 한일여실고(현 한일여자고등학교)를 다닌 이들이 많았습니다. 한일여실고는 학생들이 전국 고향에서 조금씩 가져다 운동장에 심은 팔도잔디로 유명했죠.

지금 한일합섬의 흔적은 표지석으로만 남았습니다. 그런데요. 그 많은 직원이 떠난 자리에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거든요. 많은 사람이 떠난 자리에 다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으니 땅 자체가 사람을 모으는 기운이 있나 봅니다.

햇살에 반짝이는 고층 아파트 단지와 그늘진 한일합섬 표지석이 묘한 대비를 이루는 오후, 잠시 추위를 잊은 채 이런저런 추억에 빠져들었다 돌아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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