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경남독립운동연구소 발굴
1927년 1000여 명 참가 대시위
수형기록 확인·46명 서훈 신청

하동지역에서 제2의 3·1운동이 일어난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소장 정재상)가 1927년 하동에서 제2의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46명의 수형기록을 찾은 것.

기미년 3·1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올해 벽두에 확인된 의미 있는 일이다.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는 국가기록원과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한 '형사공소사건부'·'집행원부'·'일제감시카드'·'경남도 보고서' 등 자료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이 사실을 확인했다.

▲ 독립운동가 강대용 선생. 하동 제2의 3·1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 /하동군

자료에는 제2의 3·1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른 강대용(악양면)·여국엽(악양면)·여태원(악양면) 선생 등 13명과 3남매 독립운동가 조복애(옥종면), 대를 이은 독립운동가 박성무(적량면), 옥중 순국한 정석용·이형석·이기호 선생의 기록이 담겨 있다.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는 이들 독립운동가 46명에 대해 지난달 20일 정부에 서훈을 신청했다.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하나로 지난해부터 2020년 2월까지 군내 미발굴·미포상 독립운동가 찾기 전수조사를 추진하고 있다.

◇하동서 제2의 3·1운동 거사 =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에 따르면 악양면 출신 강대용·여국엽·임성필·여태원·송우복 선생 등 20여 명이 1926년 12월 하동군 악양면 중대리 강대용 선생의 집에서 비밀리에 회합을 하고 일제의 한반도 강탈정책을 규탄하는 시위를 모의했다. 강대용(당시 41세)·여국엽(36세) 선생은 1927년 하동·광양지역 인사 100여 명에게 연락하고, 하동장날인 3월 3일 대규모 일제 규탄 시위를 하기로 했다.

▲ 독립운동가 여국엽 선생. 하동 제2의 3·1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 /하동군

동참하기로 한 지역인사는 광양지역 등을 포함해 300여 명에 달했다. 인근 주민과 상인 장꾼 500여 명도 가세했다. 시위대는 점차 늘어나 1000여 명에 달했다.

시위가 대규모로 확산하자 다급해진 일본경찰은 무력진압에 나섰다. 시위 참가자와 일본경찰 간에 무력 충돌이 벌어졌고, 강대용·여국엽·여태원·임성필·송우복 선생 등 중심인물 50여 명이 일본경찰에 연행됐다. 결국 30여 명이 재판에 넘겨졌고, 강대용·여국엽 선생 등 13명은 소요·상해 등 죄목으로 징역 2년에서 8개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100주년 맞아 의미" = 여국엽 선생의 항일기록 발굴 소식을 접한 선생의 조카 여상규 국회의원(사천·남해·하동)은 "숙부님이 투옥돼 많은 고초를 겪었다는 이야기를 부친으로부터 전해 들었다"며 "모든 독립운동가가 국가로부터 온당한 평가를 받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정재상 소장은 "이번에 발견한 사실은 1919년 이후 영호남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시위로 평가된다"면서 "이러한 내용들이 지역향토사에 단 한 줄의 기록도 없어 안타까웠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우리 역사에서 잊힌 항일영웅들에 대한 예우에 우리 사회의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가 발굴한, 하동에서 발생한 제2의 3·1운동 근거 자료 중 하나인 '형사공소사건부'. /하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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