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라고 하는 사람을 우리는 좋은 의미로 무골호인(無骨好人)이라고 한다. 법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친일했던 사람도 좋고, 항일했던 사람도 좋다고 한다면 언뜻 동의하기가 힘들다. 특히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가고파'를 지은 분이라면 더더욱 인정하기가 힘들다. 문학평론가 백철은 노산을 가리켜 '동양적인 무상의 시인'이라 했고 시인 서정주는 '애정과 향수의 시인'이라 하였으며, 수필가 피천득은 '애수적인 시인'이라 했고 시조시인 이태극은 '기교적인 시인'이라고 평했다.

경북 영덕은 3·1운동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그래서 영덕군 영해면에 기념탑이 크게 세워져 있는데 1983년 11월 29일에 준공한 이 기념탑의 조각은 조각가 민복진, 비문은 노산 이은상이 지었고 글은 김응현이 썼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일제강점기 시기에 비행기 헌납으로 유명한 친일파 문명기 묘가 영덕군 강구면에 있는데 이 묘비문도 노산 이은상이 썼다.

1969년 8월 15일에 만들어진 묘비문에는 문명기(본명 문기섭, 창씨명 文明琦一郞)를 '세상에 나서 자기 힘으로 성공하기란 어려운 일이요 또 장수하며 어진 행적을 끼치기는 더 어려운데 그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여 스스로 보람찬 생애를 누린 이'라고 치켜세우면서 '장손 의학박사, 국회의원 태준을 비롯하여 내외손 50여 명이 제제 명사들이라, 이로써 덕을 쌓은 집에는 자손이 복을 받는다는 옛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겠다'라고 썼다.

김봉천이 쓴 <노산 이은상 선생> 109, 110쪽에는 문명기 비문과 3·1의거탑 비문, 두 편이 나란히 실려 있다. 노산이 돌아가시기 한 달 전인 1982년 8월 15일에 쓴 3·1의거탑 비문에는 '피 흘리고 숨지고 매 맞고 옥에 갇히고 / 수난 속에도 굴하지 않는 의사, 열사들 / 우리 모두 그 영혼 앞에 위로를 드리고 / 그 뜻을 새겨 겨레의 갈 길을 삼으리라'고 했다. 영덕군민들이 3·1운동 때 피 흘리고 매 맞고 숨지고 옥에 갇힐 때, 문명기는 '어진 행적'을 한 게 아니고 일제와 결탁하여 제지공장을 운영하면서 한일합방을 '양국의 경사'라고 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 경남시사랑문화인협의회는 문학관 명칭 문제에 관한 논란이 있을 때인 2003년 12월 19일 '명백한 독재옹호자 노산을 누가 편드나'라는 성명서에서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살리겠다고 급기야 깡그리 망하고 쪽박조차 없이 유리걸식했던 독립혈사의 피맺힌 후손들의 아픔을 어찌 내몰라라 한단 말인가?'라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문명기의 묘비문을 쓴 1969년 전후 시기에 노산은 1962년 안중근 의사 숭모회장, 1969년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1976년 백범선생 탄신 백주년 축전준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2000년 마산시가 노산 이은상을 재조명하기 위한 질의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적당한 처세에 익숙해있기 때문'에 정작 본인은 심각한 갈등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노산이 한평생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음을 생각한다면 단순한 처세가 아니고 자신의 확고한 소신인 것 같다. 노산은 오랑캐의 침략부터 수많은 국난을 극복한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특히 식민지 시대 일제의 잔인한 수탈과 탄압 그리고 해방 후 독립운동가가 고생을 하고 있는 것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처세만으로 그의 이중적인 행동을 설명하는 것은 크게 미흡하다.

한국적 특수상황에서는 이승만의 독재정권, 박정희 군사정권과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며 이 지도자를 중심으로 친일과 항일의 구분 없이 다 함께 새 나라 건설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이 노산으로 하여금 문명기 묘비명도 쓰고 3·1운동 기념탑 비문도 쓰게 한 것이다. 제대로 친일을 청산하는 바탕 위에서 새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간판쟁이라든가 대서소에서 썼다면 우리가 이렇게까지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평소 조국애가 남달랐던 노산이기 때문에 그가 꿈꾸었던 새 나라 건설을 위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아니라 새길로 가자는 그의 주장을 눈여겨봐야 한다.

친일파99인.jpg
▲ 반민족연구소의 <친일파99인>.

그가 쓴 새길론에는 '우리가 걸어온 지금까지의 길은 묵은 길이요, 좁은 길이요, 지름길이었습니다. 남과 동행하지 아니하고 남을 오히려 해치는 그래서 서로가 망하고 죽을 것밖에 없는 실패의 길이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오늘부터 새로 출발하자고 하는 새길은 …… 남과 함께 가는 길이요, 남을 도와주는 길이요, 서로가 흥하는 길이요, 모두가 같이 사는 길이요, 최후의 승리를 가져오는 생명, 성공 길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심지어 '이 새 길, 큰 길이야말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이 길로 가야만 사는 것임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목숨을 걸고라도 이 길을 향하여 돌진해 가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문명기의 묘비명을 쓴 것이 단순한 처세가 아니고 목숨을 걸고 돌진해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어서 '죽음을 맹세하고라도 가야하는 길 이거늘 하물며 조그마한 어려움이나 고난쯤이야 참고 견디며 가야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글은 1961년 10월에 쓴 글이다. 3·15가 일어난 지 1년 7개월 후, 5·16이 일어난 지 5개월 후이다. 문학관 명칭이 노산문학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분들이 노산의 이러한 새길론에 동의하는 지가 궁금하다.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동시에 가고파를 사랑하는 일반 시민들은 무척 당황스럽다.

그렇다면 과연 문명기는 사업을 크게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으니 새 나라 건설을 위해서는 이해하고 인정하면서 함께 손잡고 동행해야 할 인물인가 아니면 민족정기를 세우기 위해 청산해야 할 인물인가? 민족정기는 노산이 평생 가장 중요하게 강조했던 가치이다.

문명기호.jpg
▲ 문명기호.

산 사람도 아니고 망자에 대해서 쓴 것까지 나무랄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 묘비문은 작성할 수 있다. 그러나 '어진 행적', '보람찬 생애'라고 찬양하는 것은 목숨을 바쳐 순국한 독립운동가를 모독하는 일이며, 친일의 죄상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진실을 왜곡시킨 죄를 저지른 것이다. 설사 문중이나 가족이 세운 공적비, 기념비도 삶의 명암을 균형 있게 담는 게 고인의 명예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공적비를 세울 정도의 인물이라면 분명 공적인 활동영역이 넓은 분일 것이다. 지나친 과장이나 왜곡은 결례이기 때문이다.

반민족문제연구소가 엮어서 펴낸 <친일파 99인>에는 글 제목에서 '애국옹(愛國翁) 칭호를 받은 친일 광신도, 문명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1878년생인 문명기는 '허영심이 강하고 인색하고 잔인하였던 개인적인 성격에 기회포착이 대단히 빠르고 아유(阿諭)와 사교력이 뛰어나고 추진력이 강하였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1910년의 한일합방이 양국의 경사이고 옛날의 회복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일본과 조선은 본가와 분가이므로 한일합방으로 한 몸이 되어 더욱 공고하게 국위를 빛낼 수 있다고 하였다. 1907년 경북 영덕에서 제지공장을 시작하면서 당시 막 우리 땅에 진출하기 시작한 일제와 밀접하게 결탁하였다. 이어서 일제 관헌과 결탁하여 광산 브로커 노릇을 하였다. 1932년 역시 경북 영덕군에 있는 금은 광산을 인수하여 자신의 이름을 따서 문명광산으로 바꾸었는데 그는 이 금광에서 노다지를 캤으며 경북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다.

지방의 친일 예속자본가로서 성장하고 있던 그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문명광산을 일본 정부의 알선으로 미츠코시 재벌에 매각한 12만 원 중에서 1935년에 육군에 애국기 보국 제120호와 해군에 애국기 보국 제73호를 각각 1대씩 헌납하는 비용으로 10만 원의 국방헌금을 기부하면서부터였다. 요즘으로 치면 10억 원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총독부는 그를 '애국옹(愛國翁)'이라고 치켜세우면서 그가 기증한 비행기 중에서 해군에 헌납한 비행기 '보국-73호'를 문명기호로 명명하는 성대한 명명식이 거행되기도 했다.경성비행장에서 열린 명명식에는 일본 해군 대신 대리가 참석했고 행사 후에는 해군기 여섯 대가 축하 비행을 하는 등 요란을 떨었다. 이 비행기를 영덕의 오십천 변에 전시까지 했다. 비행기를 헌납한 동기에 대해 그는 '금후의 전쟁은 비행기시대로서 육탄 3용사에 대신하여 육탄비행사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면서 유사시에는 자신도 '황군에 순사(殉死)할 각오'를 갖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가미가제라는 육탄비행기가 실제로 구체화되기 훨씬 이전부터 앞장서서 육탄비행기 1만 대를 준비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는 동양을 동양인의 손에 의해 지키는 것이 아시아민족이 행복하기 위한 길이기 때문이며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한 일본의 위대함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국방기 100대 기부를 결의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이세대묘(伊勢大廟)에 참배한 후 돌아와 전국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하였고(朝鮮功勞者銘鑑·399쪽) 전 조선에서 1군(郡) 1대 헌납운동을 전개하고 조선국방비행헌납회를 제창하여 1만 원을 기부하면서 대대적인 헌납운동을 벌였다. 일본 육해군 장성의 치사를 받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 높여 울고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뺨을 적시는 가운데 국방의 완비를 위하여 이 한 몸 바치겠다'고 결의한 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이 당시에 애국기헌납 기성회 사무소는 도청 지방과 내에 설치하였고 헌금은 전국의 부청, 군청, 읍면사무소, 경찰서, 경찰관주재소 및 중선일보사에서 취급하였다. 그리고 중선일보에 헌금자명단을 게재하는 것으로 영수증에 가름하거나 기성회 명의로 발급하였다.

비행기 헌납 직후 영덕국방의회 회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재향군인회, 일본적십자사 특별회원으로 선임되고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상임이사,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등을 하면서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하였다. 두 차례의 헌납에 이어 다시 육군과 해군에 각각 2만 원, 4만 원을 기부한 그는 비행기로는 부족했던지 이번에는 '헌함(獻艦)운동'을 들고나왔다. 그리고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3년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구리광산 3개를 기부했다. 세간에서는 그를 가리켜서 헌납병 환자라고 하였다.

그는 사업을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던 소극적인 생계형 친일이 아니고 세계평화를 실현시키겠다는 굳은 신념에 의해 대대적이며 헌신적으로 수차례에 걸쳐 수만 원의 거액을 기부하였다.

또한 그는 철저한 신도(神道)의 맹신자였다. 황도(皇道)선양을 목적으로 가미다나 가가비치운동신(神棚 家家備置運動)을 전개하였는데 가미다나를 전 가정에 보급하기 위해 1938년 9월 4일 경성의 조선신궁에서 광제회(廣濟會)를 조직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여 가미다나 분포식을 거행하고 조선 내의 전국 모든 가정에 배포하였다. 당시 경성부윤(지금의 서울시장)이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말하자면 전국에 집집마다 일본 조상신 부적을 모셔놓고 아침, 저녁으로 절을 하자는 것이었다. 1차로 서울의 각 정회(町會) 총대(요즘의 동장) 130명에게 가미다나를 나누어주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배포된 시초였다. 총독부는 그에게 가미다나 독점판매권을 주었다. 물론 그 자신도 집에 가미다나를 받들어 모셔 놓고서 아침저녁으로 무릎을 꿇고 공손히 배례하며 필승의 신념을 날로 굳혔으며 1943년에는 황도선양회를 조직하여 자신이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가미다나.jpg
▲ 가미다나.

그의 몸은 비록 조선으로부터 받은 것이었지만 철저한 일본인이 되고자 노력하였다. 그의 가정생활은 완전히 일본식이었는데 집안을 일본식으로 꾸미고 모든 가족이 일본 옷을 입었고 예의와 동작, 언어까지 완전히 일본식으로 개량하였다. 그리고 하오리 하카마에 게다짝을 끌고 동경을 내왕하였다 심지어 그는 어느 강연회장에서 '자신의 나이 60이지만 결코 노인이 아니다. 합병 당시에 다시 태어난 것으로 치면 시정 27년의 금일 27세의 청년이므로 적심(赤心)으로써 국은(國恩)의 1만분의 1에 보답할 결의'를 할 정도로 완전한 일본인이 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바쳤다. 1921년부터 여러 차례 경북 도평의원을 했고 중추원 참의, 영덕국방회의 의장, 문명주조(文明酒造) 대표취체역, 경북도 유도연합회 이사, 북지 황군 경상북도 파견위문단 단장, 시정 25주년에는 총독부로부터 은컵을 받았고 일본 육군으로부터 감사장과 공로패도 받았다.

문명기의 황도선양과 국방 운동의 친일적 삶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철저한 배신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 가치에 대한 모독이고 희화였다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문명기는 반민특위에 1949년 1월 29일 체포되어 조사받고 공민권 정지 2년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노산은 이런 삶을 산 문명기의 묘비에 '어진 행적', '보람찬 생애'라는 글을 적었다. 건국대학교 조일문 총장은 '노산 선생은 …… 특정한 주장을 내세워서 정파를 형성하거나 특정 정당, 특정 인물을 배격한 적은 없다. 다만 청탁(淸濁)을 함께 받아들이는 그의 큰 도량이 여야의 많은 정치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의 문을 두드리게 하였을 뿐이다'고 하였다.

독일 철학자 괴테는 '세상에는 하고 싶지만 해서 안 되는 일이 있고, 할 수 있지만 하기 싫은 일이 있다'고 하였다. 노산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달라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위해 그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많이 했다. 친일잔재를 청산하는 것은 개인의 도량이 크고 작은 문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독재 시절 여야를 구분하지 않고, 해방 직후, 1950년대에 친일과 항일을 구분하지 않은 것은 청탁(淸濁)을 함께 받아들이는 큰 도량이 아니고 평생 주장해 온 민족정기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참고자료

김복근, <노산시조론>, 도서출판 경남(2008년), 14쪽

김봉천, <노산 이은상 선생>, 창신고등학교(2002년), 109쪽

김봉천, <노산 이은상 선생>, 창신고등학교(2002년), 110쪽

반민족연구소, <친일파99인 2권>, 돌베개(1993년), 160쪽

김재현, <이은상 조두남 논쟁>, 도서출판 불휘(2006년), 562쪽

하아무, <인물경남문학사16. 시조시인 이은상>, 경남작가 2013년 제23호, 67쪽

이은상, <노산문학선>, 탐구당(1964년) 527쪽

이은상, <노산문학선>, 탐구당(1964년) 534쪽

반민족연구소, <친일파99인 2권>, 돌베개(1993년), 159쪽

반민족연구소, <친일파99인 2권>, 돌베개(1993년), 162쪽

정운현, <친일파는 살아 있다>, 책으로 보는 세상(2011년), 113쪽

김봉우 외,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역사비평사(1993년), 156쪽

심정섭, <일제의 순사들>, 도서출판 예원(2014년), 121쪽

정운현, <친일파는 살아 있다>, 책으로 보는 세상(2011년), 114쪽

정운현, <친일파는 살아 있다>, 책으로 보는 세상(2011년), 114쪽

반민족연구소, <친일파99인 2권>, 돌베개(1993년), 165쪽

김봉우 외,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역사비평사(1993년), 158쪽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도서출판 선인(2003년), 393쪽

김봉천, <노산 이은상 선생>, 창신고등학교(2002년), 121쪽

손철주, 이주은, <다, 그림이다>, 문학동네(2011년), 183쪽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