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 경남지부-경남도민일보 공동기획
성·계급·민족차별 온몸으로 맞선 그들을 기억하다
1910~20년대 여성교육 본격화
국채보상·만세시위 조직적 참여
남성 중심 사관에 기초자료 부족

경남도민일보는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광복회 경남지부와 함께 '소외된 역사, 경남 여성독립운동'을 연재합니다. 10차례에 걸쳐 매주 수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갈 예정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여성은 3·1운동을 비롯해 교육운동, 노동운동, 무장투쟁에 앞장섰습니다. 남편과 자식 등 가족의 독립운동을 묵묵히 뒷바라지하고, 곁을 지킨 이도 많았습니다.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 독립운동사는 쓰일 수 없었습니다. 경남 여성의 3·1운동과 이후 항일독립운동을 인물과 현장 중심으로 재조명해봅니다.

김원봉, 주기철, 이윤재, 안희제, 윤세주, 최수봉…. 경남 출신 독립운동가 가운데 여성의 이름은 없다. 전국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유관순 말고 떠오르는 인물이 있는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일제강점기 경남 여성은 일제와 가부장제로 억압당했다. 이러한 이중 착취에 가난까지 덮쳐 노동착취 또한 견뎌야 했다. 민족차별·성차별·계급차별 삼중의 굴레였다. 해방 이후에도 남성 중심 시스템에서 여성 독립운동 발굴과 조사는 빛을 못 보고 소외돼왔다.

◇여성교육에서 싹튼 독립운동 = 경남의 근대 여성운동은 여성교육에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마산 의신여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이나 여성계몽단체가 1910~20년대 집중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앞서 실학과 상공업 발전으로 기존 가치관이 깨졌고, 동학·기독교 사상 유입 등으로 남녀평등 의식도 커졌다.

그러나 일제가 우민화로 일관한 식민지 여성교육 정책으로, 당시 여성은 낮은 수준의 지식과 기술로 경제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30~40년대는 전쟁 인력으로 동원하는 방식이 노골화했다. 1938년 교육개정령은 '충량지순(忠良至醇)한 황국여성(皇國女性)'으로 철저히 복종하는 여성상을 교육목표로 삼았다.

▲ 3·1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지 여성교육은 우민화 정책이었다. 1936년 밀양보통학교 여학생들의 과학실험 모습(밀양초등학교). /경상남도교육청 기록관
▲ 1938년 근로보국대. 일제가 조선인 노동력을 착취하려고 만든 조직이다(마산여자고등학교). /경상남도교육청 기록관
▲ 1942년 대동아전쟁을 정당화하는 수업 모습. 왼쪽에 여학생, 오른쪽에 남학생이 앉아 있다(창원 성호초등학교). /경상남도교육청 기록관

◇"지역 3·1운동은 여성이 주도" = 1907년 차관을 갚아 일제로부터 주권을 되찾으려 한 국채보상운동에서 여성 활약이 돋보였다. 전국 각지에서 여성단체가 조직되는데, 진주와 창원 등에서도 국채보상부인회가 금·은·패물·곡물을 모아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19년 3·1운동에서 여성인 학생·교사·부인·기생은 독립선언서 전달, 태극기 제작, 시위 군중 연락책 등을 맡았다. 박용옥 전 성신여대 교수는 <한국여성항일운동사연구>(1996)에서 "지방 만세시위에는 여성의 활약이 없는 곳이 없었다. 특히 지방 중소도시에서의 만세시위에는 여성들이 먼저 독자적으로 계획해 추진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했다. 경남에는 진주 걸인·기생독립단 만세운동, 통영에서 기생단을 조직해 만세시위를 벌인 이소선·정막래 등 무수히 많은 사례가 있다.

3·1운동 직후 4월 중국 상하이에서는 우리 역사상 최초 민주공화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임정에서 발표한 첫 헌법인 임시헌장은 남녀평등권과 여성 참정권을 명시했다. 1920년대 이후에는 신간회 영향으로 여성계 좌우합작 단체인 근우회가 전국적으로 조직돼 항일운동을 폈다. 경남지역도 이 같은 국내외 흐름에 영향을 받았고, 하동의 제영순·조복금 등이 관련 활동에 앞장선 인물이다.

◇노동착취에 시달린 삶 = 사회주의 여성운동과 노동운동도 이어졌다. 농민들은 농촌경제가 무너지면서 삶의 기반을 잃었고, 일본인 농장에서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거나 도시를 떠돌며 일용직 노동자나 공장 노동자로 살았다. 남녀가 따로 없었다.

1920~30년대 진해 여좌동 후쿠다 타월공장 여성노동자 동맹파업·동양제사주식회사 진해공장 남녀 공원들의 노동 쟁의도 이 같은 현실을 보여준다.

이혜숙 경상대 교수와 강인순 경남대 교수는 <나는 대한민국 경남여성>(2015)에서 "당시 여성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공사장으로 나가야 했다. 마산의 하천 개수 공사장 12시간 노동에 임금이 겨우 20전, 30전이었지만 많은 여성이 그 일을 해야 했다(조선일보 1935년 3월 13일)"고 전했다.

◇지역사회 연구·복원 나서야 = 여성 독립운동이 묻혀 있는 이유 가운데 그동안 역사가 남성 중심으로 기술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지역사회에서 자료 수집부터 기념사업까지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잇따른다.

2015~16년 '경남의 독립운동가, 여성운동가들' 연구 논문을 쓴 양미숙 부산참여연대 사무처장은 "국사 편찬에서도 여성 독립운동 부분은 아주 소략한 편"이라며 "대통령을 비롯해 관계기관이 역사 복원의 책임의식을 갖고 독립유공자, 후손, 연구자, 향토사학자와 함께 다양한 연구·조사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언론인 출신 정운현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2016년 발간한 <조선의 딸, 총을 들다>에서 "우선 1차 자료를 찾고 유적지를 뒤지는 일이라도 서둘러야 한다"며 "기초자료가 수집되는 대로 서훈신청을 하여 공적을 제대로 평가받게 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런 연후에 기념사업과 현창사업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서훈 기준 변화, 지자체의 구체적인 역할 모색에 관한 지적도 나온다.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은 "여성독립운동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합당한 서훈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 또한 '여성독립운동가 서훈 전문관'을 양성하고 담당 부서도 개설돼야 한다"며 "지자체에서 발굴·연구 기관과 향토사학자 등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 시스템을 고심해주면 좋겠다"고 밝혔다.

※참고문헌

<한국여성항일운동사연구>(1996), 박용옥, 지식산업사

<조선의 딸, 총을 들다>(2016), 정운현, 인문서원

<경남의 독립운동, 그 현장과 운동가들>(2016), 김두천 외, 선인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2018), 이윤옥, 얼레빗

<나는 대한민국 경남여성>(2015), 이혜숙·강인순, 지앤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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