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순간,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창원 대산면-밀양 하남읍 잇는 다리, 국경 건너듯 묘해
구멍가게·3대 국수공장·너른 들판…이색적 경험 선사

수산교는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일동리와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를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가까이에 수산대교라고 1997년 개통한 크고 넓은 다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일부러 작은 수산교 쪽으로 가곤 합니다. 이 다리도 수산대교를 지은 해에 수리를 해서 낡은 다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저한테는 뭔가 오래된 정겨운 다리 같거든요.

▲ 창원 대산과 밀양 하남을 잇는 수산교. /이서후 기자

◇강변에서 람수(攬秀)하다 = 매번 수산교를 지날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듭니다. 지금까지는 그게 뭘까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다리를 건널 때만 살짝 나타났다 사라지거든요. 지난 크리스마스에 이 다리를 건너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묘한 기분. 그건 변방(邊方)이 주는 느낌 같았습니다. 가장자리에서 가장자리로 이동하는 순간. 그것은 유럽에서 국경을 걸어서 건널 때와도 비슷한 느낌입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경을 이루는 미뉴강이라고 있습니다. 이 강 위에 걸쳐진 다리를 걸어서 지났었죠. 유럽 국경이 대부분 그렇듯, 눈에 두드러진 경계는 없었지만 한 나라의 영역을 벗어나 다른 나라의 영역으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이 주는 묘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 1538년 창건한 남수정. /이서후 기자

수산교 사진을 찍어보려고 낙동강변으로 향합니다. 강변에 오래된 팽나무가 한 그루 있고, 그 옆으로 문이 잠긴 오래된 한옥이 있습니다. 담장 너머로 '정수람(亭秀攬)'이라는 현판이 보입니다. 아, 오른쪽부터 읽어야 하니 '남수정'이겠네요. 자료를 찾아보니 참 굴곡이 많은 곳이네요. 1538년에 창건한 곳입니다. 1593년에 '남수'란 이름을 붙였네요. 이후에 나라의 양곡을 보관하던 창고로 쓰이다가 불에 타 사라지죠. 이후 수산 일대에 살던 광주 김씨 문중에서 다시 누각을 지었는데 또 화재가 납니다. 그러다 1865년 진해현감으로 있던 김난규가 다시 남수정을 지어 올립니다. 그 이후 1977년부터는 지금 같은 모습이 되었고요. 현재는 광주 김씨 문중의 대종실로 쓰이고 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남수(攬秀)'는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본다는 뜻이네요. 강변에 가만히 서서 수산교와 그 아래 흐르는 낙동강을 보며 람수하고 돌아섰습니다.

◇오래된 것이 버티는 거리 = 사실 수산교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다리가 또 있습니다. 창원 동읍과 창녕 부곡을 연결하는 본포교입니다. 수산교가 본포교와 다른 점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바로 일종의 변경 도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하남읍내입니다. 국경이란 느낌을 더욱 강하게 주는 부분이죠. 몇 번 다녀가긴 했어도 이제껏 하남읍내를 제대로 알아본 적은 없습니다. 이번에 다녀보니 버스터미널에서 우체국, 소방서, 경찰서, 도서관, 공원, 초·중·고등학교 같은 기본적으로 도시가 갖춰야 할 공공시설이 다 있는 번듯한 도심이네요. 이곳도 조금씩 변하고 있습니다. 새로 아파트도 짓고 있고, 예쁘장한 카페도 제법 들어섰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오래된 것들이 버티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 밀양 하남 읍내 /이서후 기자

구멍가게를 겸하는 버스터미널부터 여전히 정겹습니다. 주로 밀양 시내에 있는 버스터미널을 오갈 때 거치는 곳입니다. 터미널 앞 도로를 따라 걸으면 나지막한 건물들이 이어집니다. 유명한 수산국수 공장이 이 거리에 있네요. 3대 70년에 걸쳐 전통 방식으로 국수를 만드는 곳입니다. 입구에서 바라보면 보이진 않는데, 낡은 건물 안에 국수를 널어 말리는 공간이 있습니다. 국수 공장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공장과 이어진 낡은 슬레이트 단층 건물입니다. 농자재, 비료를 파는 곳인데 아직도 장사를 하는 것 같습니다. 녹슬고 퇴색하고 무너져 가는 간판이 그대로 남아 있어 더욱 느낌이 좋습니다. 이런 풍경을 제대로 살리면 제법 재밌는 거리가 될 것도 같습니다. 크리스마스 휴일이라 한산한 분위기네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 서넛이 상기된 얼굴로 어디론가 걸어갑니다. 조금 더 걸으니 새로 지은 산뜻한 건물이 드문드문 나옵니다. 그들 중 카페 한 곳으로 들어섭니다. 안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하기도 하고, 커피도 한 잔 하고 싶었거든요. 한창 점심때라 그런지 따로 손님은 없고, 카페 주인 가족인 것 같은 사람들이 케이크를 두고 둘러앉아 있습니다. 그들 중 할머니가 저를 먼저 발견하고 '어서 오이소' 인사를 합니다. 한산한 거리와 달리 무척이나 따뜻한 풍경이어서 문득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를 즐기는데 괜히 방해가 된 것 같아 미안하네요. 얼른 커피를 받아 나옵니다.

◇너른 하남 들판을 바라보며 = 커피의 온기를 두 손으로 감싸고 다시 거리를 걷습니다. 오래된 빌라 3층 창문으로 터져 나올 듯 크게 자란 선인장이 보입니다. 왠지 그 선인장이 이 땅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하남 읍내 너머로 펼쳐진 하남 평야는 이 일대 대표적인 곡창지대입니다. 평야 풍경을 보기에는 당말리공원이 제격인 듯합니다. 여유롭게 5분 정도만 걸으면 정상에 도착합니다. 햇살이 잘 드는 곳이라 곳곳에 웅크린 고양이들이 숨어 있습니다. 놀라지 않게 조심조심 걸음을 옮깁니다. 공원 정상에 수산 지역을 수호한다는 당산나무와 당집이 있습니다. 매년 이곳에서 당산제도 지냅니다. 당말리란 이름도 여기서 나온 거겠죠. 정상에는 수덕사란 절도 있네요.

▲ 당말리공원서 바라본 하남 읍내와 낙동강. /이서후 기자

이곳에서는 하남읍내랑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반대편으로 넓은 하남평야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저 너른 들판 상당부분이 조선시대에는 저수지였답니다. 고려시대부터 수산제(守山堤)란 제방이 있었다는데요. 고지도를 찾아보니 제법 큰 저수지가 그려져 있습니다.

다시 낙동강을 바라봅니다. 대체로 큰 강은 자연스럽게 어느 지역과 어느 지역의 경계가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경계는 에너지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서로 다른 것이 간섭하며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변화를 일으키게 되기 때문입니다. 경계 이쪽과 저쪽의 차이가 클수록 그 에너지도 더 커지겠죠. 그래서 우리네 삶도 때로 위태로운 경계에 서봐야 하는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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