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차별 어둠 밝힌 형평운동 근원지
백정과 함께 예배 보도록 한 진주교회
일제 수탈 종착역 차량정비고 등 찾고
참가 학생들 진주박물관서 느낀점 발표

2018년 진주는 김해한얼중(5월 2일)과 마산무학여고(12월 8일)가 찾았다. 한얼중은 진주역차량정비고~문산성당~촉석루~의기사, 무학여고는 문산성당~진주교회~진주향교~옥봉경로당~국립진주박물관~의기사~진주역차량정비고를 둘러보았다. 한얼중은 흥미를 돋우려고 미션과 퀴즈를 섞었고 무학여고는 해설을 더하면서 스스로 느끼도록 하였다.

◇조화로운 문산성당과 운동의 역사 진주교회

문산성당 자리는 진주의 동쪽 나들목에 해당된다. 원래 소촌역이 있었다. 조선시대 역은 지금으로 치면 '국립 모텔'쯤이다. 더불어 공무로 오가는 이들은 갈아탈 말도 제공했고 일반 백성들은 불심검문도 했다. 천주교 박해 시절에는 신앙 때문에 숱한 사람들이 붙잡히기도 했다. 그런데 1890년대 개화를 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역과 봉수를 통하여 정보를 전달하는 역참제가 폐지되고 우편제도가 채택되었다. 이로써 소촌역이 비게 되자 천주교에서 사들였다. 박해의 자리에 신앙의 공간이 세워진 것이다.

▲ 문산성당 한옥과 양옥 성당을 배경으로 삼아 찍은 기념 사진. /김훤주 기자

문산성당은 한식과 양식 건물이 나란하다. 기와집이 당연히 오래되었고 고딕 건물은 나중에 지어졌다. 기와집은 처음부터 예배(미사) 공간으로 지었다. 들어가 앞쪽 제단과 늘어선 기둥을 보면 알 수 있다. 1930년대 언덕에 기대어 콘크리트 뾰족 건물을 지으면서 예배 공간으로 삼았다. 지금 강당으로 쓰이는 한옥은 야트막하면서도 당당하고 양옥은 솟아올랐지만 아담함을 잃지 않았다. 학생들은 신기해하면서 두 건물을 안팎으로 둘러보고 인증샷도 남겼다. 이런 조화로움은 다른 오래된 성당에서도 누리기가 쉽지 않다.

이어 진주교회를 찾았다. 1919년 만세시위 당시 여기서 울려퍼지는 종소리를 시작 신호로 삼았다. 그래서 다른 건물은 신축하면서도 종과 종각만은 예전 그대로 두었다. 이 교회는 형평운동과도 인연이 깊다. 1890년대 신분차별은 공식 폐지되었으나 실상은 달랐다. 소 잡는 백정은 결혼을 해도 가마를 타지 못했고 죽어도 상여를 쓰지 못했으며 일반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도 앉을 수 없었다. 진주교회는 이런 차별을 없애고 백정도 같이 예배를 보게 하였다. 그러자 일반 신자들이 반발을 했고 이를 계기로 형평운동이 더욱 촉발되었던 것이다.

◇경남 최초 진주향교와 옥봉경로당

요즘 공립 중·고교격인 향교는 대부분 조선 초기에 들어섰다. 하지만 진주향교는 훨씬 앞선 고려 초기에 경남 최초로 뿌리를 내렸다. 지리산 자락과 남강 물줄기를 낀 데다 들판이 너르고 바다도 가까워 오래전부터 많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규모도 가장 큰 편이고 위세 또한 대단하다. 입구 표지 하마비와 정문 풍화루를 지나 공부 공간 사교당·명륜당을 거쳐 제사 공간 대성전까지 가파른 언덕을 따라 차례대로 들어서 있어서 상승감이 굉장하다.

뒤이어 찾은 옥봉경로당은 보기 드물게 한옥 건물이다. 학생들이 그 예스러움에 놀라고 있는데 안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나오신다. 처음에는 사양하시더니 곧바로 건물이 지어진 내력과 한문 현판을 두고 얘기를 들려주셨다. 경로당은 전통시대에는 있지 않다가 이른바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생겨났다. 옛날 농경사회에서 노인은 경험을 갖춘 지혜의 창고여서 당연히 존경받았지만 산업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았기에 경로를 조장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 마산무학여고 학생들이 옥봉경로당을 찾은 장면. /김훤주 기자

◇국립진주박물관과 의기사

임진왜란을 공부하면 국립진주박물관을 한 번은 찾게 된다. 유일한 임진왜란 전문 국립박물관이다. 올 11월에는 10년 만에 전시 내용을 재구성하면서 임진왜란실을 크게 늘렸다. 5월 한얼중은 작업 중이어서 둘러보지 못했고 12월 무학여고는 살펴볼 수 있었다. 자유롭게 둘러본 다음 돌아가며 소감 발표를 했는데 몇몇은 내용이 인상깊었다. 꼼꼼하게 살펴야만 할 수 있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고향이 경북 영천이다. 전국 각지 의병 활동이 전시되어 있었다. 영천을 지키기 위해 싸운 의병장이 권응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의 나이가 40살이었다고 한다. 전시를 보니 아들 광해군이 아버지 대신 백성들을 보살피고 군대를 조직하기 위해 전국을 다녔다. 그때 나이가 우리보다 두 살이나 어린 열일곱이라 놀랐다." "일본군이 잘라간 조선인의 코가 경남이 일본과 가까워서 가장 많을 줄 알았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남이 가장 많아서 뜻밖이었다."

▲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둘러본 소감을 공유하는 모습. /김훤주 기자

의기사는 논개가 주인이다. 여자를 모시는 사당은 드물다. 논개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대단했다는 얘기다. 논개의 죽음은 1593년 처절하게 패배한 진주성2차전투와 관련되어 있다. 한 해 전 김시민 장군의 조선군과 붙은 진주성1차전투에서 깨진 왜군의 복수전이었다. 사람은 물론 짐승까지 살아 있는 것이라면 모조리 도륙한 그 살벌함에도 숨죽여 엎드리지 않고 일어난 논개였다. 뒷날 다산 정약용과 매천 황현 같은 선비는 물론 후배를 자처한 산홍까지 여기를 찾아 시문을 남긴 까닭이다. 산홍은 을사오적 이지용에게 첩 되기를 거부했다가 매질을 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진주 기생이다.

◇일제 수탈의 종점 진주역차량정비고

침략과 수탈은 철도를 타고 이루어졌다. 일제는 내륙 침탈을 위해 밀양 삼랑진역을 기점 삼아 1905년부터 서쪽으로 경전선을 깔았다. 진주에는 1923년에 이르렀는데 그러고는 더 나가지 않았다. 진주 서쪽에는 수탈할 대상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주역은 1945년 해방이 되고 1968년 경전선이 섬진강을 넘을 때까지 경전선의 경남쪽 종점이었다.

▲ 김해한얼중 학생들이 진주역차량정비고에 들어가 즐겁게 뛰어다니는 모습. /김훤주 기자

종점이라서 들어서게 된 것이 차량정비고였다. 삼랑진역 급수탑에서 물을 채우고 석탄으로 데워 진주역까지 몰고 와서는 돌아가기 위하여 점검을 하고 이상이 있으면 수리를 했다. 그래서 아래는 들어갈 수 있도록 파져 있고 바깥은 붉은벽돌로 마감했다. 문짝을 달았던 데는 중력을 더 견딜 수 있도록 튼튼한 화강석을 박았다. 석탄 대신 기름을 쓰면서 역할이 끝났는데 예술적이라 해도 될 만큼 그럴듯하다. 학생들은 함께 둘러보며 사진을 찍은 다음 돌아가는 발길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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