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같은 삶에도 희망은 떠오른다
가진 것이라곤 절벽뿐인 소렌토…포도 한 그루 심을 공간도 없어
20세기 초부터 세계적 관광지로…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도

애초 내 여행에서 카프리는 일종의 햇빛 잘 드는 뒤뜰과 같은 곳이 되리라 기대를 했었다. 남들 눈에 들키지 않고 친구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하고 놀기 좋은 곳, 그곳에는 철마다 꽃도 피어나 누님들이 자주 소꿉놀이 하던 곳이며 엄마도 장독대 손질을 위해 자주 오시는 곳이었다.

그런 카프리의 밤은 적막이었다. 밤새도록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토바이 굉음이나 폭죽 소리, 옥탑방 건너 옥상의 개 짖는 소리, 골목길 식육점 사장의 고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중무장한 로마 군단에서 잠시 휴가를 나온 기분이었다.

◇절벽의 도시

카프리는 백색의 섬이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백색의 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항구는 모두 백색 일색이었다. 아나 카프리의 몬테 소랄로에서, 빌라 산 미켈레(villa San Michele)와 카프리 본 섬 코뮤네 앞의 그 좁은 광장, 아우구스트의 별장(Giardini di Augusto)에서 본 카프리의 주택과 공공건물, 호텔 할 것 없이 모두 하얀색이었다. 하얀색이 아닌 것은 오로지 좁은 골목길을 누비는 오렌지색의 미니버스뿐 이었다.

호흡이 자연스럽고 피부로도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밤거리도 하얀 벽에서 반사되는 불빛이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었다. 마치 하얀 색이 아니면 동지로 취급해 주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 절벽의 동네 포시타노. 20세기 초 이곳은 유럽인들의 휴양처가 되어 절벽의 인생을 마감하게 해 주었다.

하룻밤을 보내고 점심 무렵에 도착한 소렌토(Sorrento) 항구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소렌토가 가진 것이라면, 이것도 가진 것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깎아지른 절벽뿐이었다. 소렌토는 그런 곳이었다.

나폴리처럼 도시가 크거나 오래된 역사의 유산도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변이 길게 뻗어 눈을 쉬게 할 수 있는 것이라든지 너른 광장, 유명한 시장조차도 없었다. 차마 말하기도 미안하지만 폼페이와 같은 조상이 물려준 '탁월한 오락 거리'도 없었다.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오직 절벽, 이것이 이들의 절벽이었지 않았을까? 앞이 보이지 않는 절벽 말이다.

아말피로 가는 버스 아래로는 수백 미터 낭떠러지, 파도가 부딪쳐 만들어 낸 하얀 포말이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증거를 남기고 다시 먼 바다로 물러갔다. 위쪽으로 쳐다보면 더 가물가물하다. 강철로 밧줄을 만들어 온통 절벽을 감싸 놓았다. 혹시나 있을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함인데 그래도 그 중간 즈음에 새처럼 집을 짓고 오히려 그것을 즐기려는 사람도 있으니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길 아래 절벽도 마찬가지다. 사는 것은 이처럼 자기 입맛대로다. 포시타노(Positano)에서 아말피(Amalfi)까지의 해안은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해안경관지구다. 구불구불 모퉁이를 돌 때 마다 절벽 같은 언저리에 동네가 살포시 앉아 있었다. 이들 동네는 절벽이 삶의 절벽이었을 것이다. 어디에도 포도나 올리브 나무 한 그루 심을 수 있는 공간조차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인생은 늘 역전이 허락되는 드라마와 같은 것, 절벽이 인생의 절벽을 마감하게 해 준 하늘의 선물인 것을 깨달은 것은 지난 20세기 초 정도부터였다. 이곳 아말피와 소렌토, 카프리의 절벽은 알고 보니 하늘이 준 선물이었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2000년이 걸렸다.

◇2200년 전 해전

우리나라에도 아말피 해안 못지않은 길이 많이 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섬진강 길은 이들이 아말피 해안을 일컫는 형용사인 가슴 떨리게 하는 수준 정도가 아니라 가슴을 부둥켜 안고 강물로 빠져들게 하는 길이다. 남해의 그 오밀조밀한 해안 길은 모퉁이를 돌 때마다 마치 섬을 헤엄쳐 가는 기분을 들게 할 정도이고 금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다도해의 그 풍광을 어디에 비교할 것인가?

나는 카프리에서도, 이곳 소렌토로 건너와서도 그리고 아말피로 가는 그 좁고 스릴 넘치는 해안 길에서도 내 의식의 시선은 소렌토 반도 그 끝자락에 가 있었다. 나폴리만의 남쪽, 카프리와 몇 걸음 떨어져 마주 하고 있는 곳, 언젠가 그 끝 부분에 서서 지중해를 바라보고 싶었었다.

이곳은 2200여 년 전 로마의 5단층 갤리선 전함들이 나폴리만을 떠나 저 남쪽 시칠리아 앞바다로 출전했던 바로 그 바다다.

한니발 전쟁 초기 로마는 3단층 갤리선뿐이었지만 한니발의 카르타고는 5단층 갤리선을 120척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3단층 갤리선은 노잡이가 100명, 전투원 100명이 승선할 수 있었지만 5단층 갤리선은 각각 300명씩 그러니까 배 한 척에 600명가량이 승선할 수 있는 대형 함정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항공모함과 일반 군함의 차이다.

하지만 아무리 로마라고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카르타고의 5단층 갤리선과 같은 전함을 짧은 기간 내에 건조하지 않으면 패배는 분명한 것, 이곳 나폴리만은 따뜻하고 잔잔한 천혜의 항구를 이용하여 한니발 전쟁을 위한 갤리선을 건조하였던 곳이다. 그 갤리선 전함들이 편대를 이뤄 출발했던 곳이 바로 소렌토 반도와 카프리 사이 그 좁은 골목길과 같은 바다였다.

괴테는 소렌토 반도의 끝 부분, 뾰족한 그곳을 미네르바곶이라고 불렀다. 오후 4시 즈음에 아말피에서 돌아와 긴급하게 모터사이클을 렌트했다. 반환 시간이 7시이므로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도 않았다. 불가피하게 나까지도 그 매캐한 냄새를 뿜어 대는 모터사이클 대열에 끼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5시가 될 무렵에 소렌토 반도의 마지막 마을인 테르미니(Termini)를 통과해서 납작한 돌로 포장을 해 놓은 울퉁불퉁한 산길을 지나니 길은 다시 더욱 상태가 좋지 않은 곳으로 접어들었다. 태양은 이미 카프리 섬 위에서 넘어가고 있는 중이었으나 아직 그래도 한 시간은 족히 더 떠 있을 것이다. 30분쯤 후에 미네르바곶에 당도할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하나

한참을 서서 카프리 쪽 바다를 바라보았다. 2200년 전 전함들이 통과하는 것이 보였다. 전함의 밑바닥에서 웃통을 벗은 채로 노 젓는 노잡이들의 기합 소리도 들렸다. '둥둥, 둥둥둥' 북 소리도 들렸다. 나폴리만을 채웠던 선단들이 줄을 지어 이곳 미네르바 곶을 통과하더니 남쪽으로 몇 척씩 편대를 지어 떠내려갔다. 테르미니 언덕에는 많은 사람들이 환송을 하러 나왔다. 이 해전이 한니발 전쟁의 승패를 쥐고 있었다. 결국은 중무장 육군으로 출발했던 로마도 해전의 승리로 한니발을 궤멸시킬 수 있었으니 절벽이 반드시 절벽만이 아닌 것은 역사로도 증명이 된다.

한참 동안 감았던 눈을 떴다. 내 눈앞에는 하얀 범선 한 척이 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하나는 바로 미네르바곶과 카프리 섬 사이의 좁은 바다를 빠져 나가는 범선의 뒷모습이리라.

▲ 미네르바곶에서 본 섬 카프리. 괴테는 카프리와 미네르바곶을 지나는 범선의 모습을 하나의 '완벽한 미'라고 생각했다.

아, 나는 상상 속에서나 서 있었던 곳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다! 괴테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떠나는 것을 본다면 분명 그리움으로 죽어 버릴 것이라 했던 그곳, 그 장면을 나는 보고 있다.

아말피 해안을 유람하고 돌아오는 시티투어버스 속의 자동 안내 방송에서는 '돌아오라 소렌토로'가 반복해서 방송 중간중간에 흘러나왔다. 절벽의 도시, 자랑할 것이라고는 절벽밖에 없는 소렌토를 떠나 버린 연인을 향해 울부짖는 노래다. 하지만 나는 이제 소렌토를 떠난다, 잘 있거라 소렌토여! 절벽의 도시여! /글·사진 조문환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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