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몰랐던 우리 동네 문화재 가치 '재발견'………
이따금 가본 대방진굴항·다솔사…소중한 해양군사·민족교육 거점
소풍 장소인 선진리성 벚꽃놀이…일제강점기 시작된 유래 알게 돼

사천 역사문화탐방은 사천 남양중 학생들이 11월 6일 찾았다. 오전에는 대방진굴항과 다솔사, 오후에는 선진리왜성·조명군총과 갯벌(금문소공원)을 둘러보았다. 사천 학생이라 해서 사천의 역사 문화를 잘 아는 것은 아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대로 오히려 더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게다가 서울이나 부산 또는 하다 못해 창원 같은 더 큰 대처가 훌륭하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래서 자기가 나고 자란 고장을 둘러보는 것은 뜻깊은 일이다. 자기 고장에 어떤 문화재가 있고 어떤 역사가 있는지를 알게 되면 고장에 대한 자부심과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불쑥 커지기 마련이니까.

◇대방진굴항이 옛적 군사시설이라고?

대방진굴항도 마찬가지였다. 가까이 있으니 한 번씩 찾기는 했지만 조선시대 해양군사시설인 줄은 모른다. 삼천포해협 빠른 물살을 타고 외적선이 쳐들어오는 데 대한 대비책으로 부러 파서(掘) 만든 항(港)이다. 지금도 안에는 고깃배들이 들어와 있는데 이게 바깥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군선이 숨어 있다가 적선이 나타나면 곧바로 출격하도록 갖춰놓은 기지인 셈이다.

▲ 남양중 학생들이 대방진굴항을 찾아 오래된 나무들 아래로 걸어가고 있다.

둘레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빙 둘러서 있다. 연세가 500살은 넘은 듯한 나무가 수두룩하다.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일러주는 지표다. 어쩌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을 보았을 수도 있다. 때마침 가을이 무르익는 시절이라 단풍까지 아름답게 물들었다. 나무들 아래로 학생들이 걸어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보고 밖으로 나와보고 하면 조금만 살펴도 여기 굴항의 쓰임새를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게다가 옛적 해양군사시설로는 우리나라에서 사실상 하나뿐이라 하니 그 소중함이 좀더 살갑게 다가온다.

◇한 번쯤은 갔던 다솔사지만

다솔사 또한 사천 학생은 한 번쯤 가본 장소가 된다. 거기 올라가는 산길 소나무가 멋지고 건물들이 아담하며 둘러싼 산세와 수풀이 아름답다는 것은 나름 아는 편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거점이었고 지역 민족교육의 출발지였으며 나아가 그 중심에는 사천 출신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여기 거처했고 소설가 김동리가 여기서 주요 작품의 모티브를 얻었다는 정도도 대부분 모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다솔사를 찾은 남양중 학생들이 야생차밭 은행나무 아래에서 즐거워하고 있다.

자세히 그리기와 인증샷 찍기, 궁금한 것 찾아 질문 만들기 세 가지를 미션으로 주어 지겹지 않게 둘러보게 한다. 이어서 자세히 그리기를 잘했거나 좋은 질문을 가져온 친구 몇몇에게 문화상품권을 선물로 안긴다. 이렇게 묻고 답하기를 통하여 사람 효당 최범술이 있어서 지역과 전국에서 독립운동을 조직하기 위하여 한용운을 모셔왔으며 아이들 민족 교육을 위해 광명학원을 세우고 김동리를 선생으로 초청했다고 일러준다. 이런 사천 사람이 없었다면 만해나 동리는 사천과 인연이 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소풍 자리인 선진리성에는

고려시대부터 우리 성터였던 선진리성에는 지금 왜성이 자리 잡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여기를 거점으로 삼으면서 쌓았다. 왜성 이전 흔적도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일제강점기 이후 모습이 잘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1598년 10월 조명연합군은 왜군을 물리치고 사천읍성을 되찾자 2차로 선진리왜성 공격에 나섰다. 4만 넘는 대군이 나섰으나 7000밖에 안 되는 왜군에게 참패했다. 안으로는 자중지란이 일어나 지리멸렬했고 밖으로는 상대 장수인 시마즈 요시히로가 잘 싸웠기 때문이다.

300년 남짓 세월이 흘러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시마즈의 후손이 찾아왔다. 1918년 가장 높은 데에 조상이 대승을 거둔 자리라는 기념비를 세우고 벚나무 1000그루를 심으면서 공원으로 꾸몄다. 벚꽃놀이가 이 시기에 시작되었는데 나중에는 조선총독부가 1936년 이 일대를 사적으로 지정했다. 기념비는 해방이 되면서 사라졌지만 벚꽃놀이는 지금도 벌어진다. 벚꽃놀이를 해도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이충무공사천해전승첩기념비도 여기 있다. 구석진 자리도 아닌데 처음 본다는 학생이 대부분이다. 그동안 관심을 갖고 알려주는 어른이 없었기 때문이겠지. 선진리성에서 내려다보는 바다가 바로 적선 26척을 모조리 깨부순 이순신 장군의 사천해전이 벌어졌던 자리다. 거북선이 처음 출격해 실전에서 그 효용성을 인정받았으나 이순신 장군은 이 해전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고 평생을 괴로워했다.

◇조명군총이 일러주는 얘기는

선진리왜성을 공격하다 목숨을 잃은 조·명연합군은 조명군총으로 남았다. 일본 기록을 따르면 3만8000에 이르고 조선 기록을 보아도 7000을 웃돈다. 왜군은 시체에서 왼쪽 귀를 베어가 전리품으로 삼았다. 일본 교토에 가면 커다란 귀무덤이 있다. 조선 백성과 군사들의 귀와 코가 20만 넘게 묻혀 있다. 뜻있는 사천 사람들이 1996년 여기서 흙을 가져와 조명군총 옆에 안치하고 귀무덤을 알리는 빗돌을 세웠다. 전쟁의 참혹함을 잊지 말자는 뜻이겠다.

▲ 조명군총을 둘러보고 나오는 남양중 학생들.

명나라는 조선을 구원하러 왔지만 공짜는 아니었다. 명은 갑이고 조선은 을이었다. 갖은 요구와 주문을 해댔으니 그 폐해는 조선 백성 하층민에게 집중되었다. 명군은 배불리 먹었으나 조선군은 그렇지 못하였다. 일반 백성 중에서도 여성·아이와 노인들은 죽지 못해 사는 형국이었다. 명군이 먹다버린 음식물 찌꺼기라도 만나면 감지덕지해야 했다. 자기자신을 자기 힘으로 지키지 못할 때 그 대가는 혹독할 수밖에 없다. 물론 멀리 조선땅까지 끌려왔다가 목숨을 잃은 명나라 군사는 지금도 그때도 무죄다.

◇마무리는 갯벌에서

조명군총까지 둘러본 뒤에는 금문소공원 드넓게 펼쳐지는 갯벌을 찾았다. 갯벌은 사천의 명물이다. 썰물 때는 멀리 끝이 보이지 않도록 빠졌다가 밀물이 들면 바로 앞에 닻을 내린 고깃배까지 들어올린다. 한 번 눈에 담아보면 그것만으로도 온몸이 상쾌해지고 머리가 맑아진다. 먼저 '사천 도전 골든벨!'로 하루 전체 일정을 정리하고 상품권도 선물로 나누고는 잠깐 짬을 내어 갯벌에 함께 들어가 즐겁게 노닐었다.

▲ 사천만 드넓은 갯벌에서 남양중 학생들이 어울려 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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