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향한 관찰…나에 닿는 성찰

어쩌면 시인은 끊임없이 뒤돌아 보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정기석 시집 <고고인류학개론 개정증보판>(펄북스, 2018년 11월)에는 관찰과 성찰 사이에 서 있는 한 사내가 보인다.

"지난 가을,/ 고독한 아침을 기어가고 있는 아저씨를 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늙고 지친 달팽이인 줄 알았다/외투는 이슬에 젖고 피부는 햇볕에 쓸려/ 어깨나 보폭이 눈에 거슬리게 좁았다" ('달팽이의 산책' 중에서)

"용두산공원에 올라가 보면/ 당신들의 부모가 백반 정식처럼 한상 잘 차려져 있다/ 근현대사에 시달린 벤치마다/ 녹이 슨 노인들이 너트와 볼트처럼 잘 접착돼 있다" ('용두산 엘레지' 중에서)

아마도 이제 나이가 제법 들어서일 것이다. 세상을 향한 응시를 통해 끊임 없이 자신의 구성요소를 생각하고 있다.

"너의 아버지나, 나의 아버지나/ 우리의 그 모든 아버지들은 다/ 그런 구차스러운 태도와 방식으로 처자식을 먹여 살렸다/ 이토록 무명의 노인으로 늙으려던 계획은 아니었다/ 그동안 처자식 이하 너희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토록 투덜대고 놀려댄 것이다" ('아버지의 혁명' 중에서)

"도시에 살며 주로 종사한 업무는 사랑이었다/ 직업은 아니었으나 생업처럼 매진하고 헌신했다/ 사랑이 힘겨워 그녀와 도시를 떠났으나/ 그녀와 도시에서 벌인 지리학은 잊지 못한다" ('사랑의 도시지리학' 중에서)

결국 그가 발견한 것은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신이다. 온전히 인간 자체로만 존재하는 삶, 그것은 외로운 유랑이고, 결국에는 사랑이다.

"여생은 유럽연합이나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종의 난민으로 살고 싶다 (중략) 됐다, 그만하면, 그 정도면/ 얼마든지 사회에 대한 불만 없이/ 선량한 시민으로 생활할 만하다/ 그 정도 마을이라면/ 일개 난민일지언정 사람 구실을 하며 살아갈 자신이 있다." ('유럽 난민 신청 승인 독촉장' 중에서)

"고민이나 걱정거리는 다양하지만 시간이 다 해결해준다는 것이다/ 가끔 외롭거나 그립지만 적당히 즐길만한 수준이다/ 늙는 건 힘들지만 당장 죽는 것보다는 견딜만하다// 게다가 지금 나는, 한 여자를 또 사랑하고 있다." ('행복의 근본적 원인' 중에서)

펄북스, 147쪽,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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