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라이프니츠는 타자와의 소통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타자의 고통이나 슬픔에도 공감하기 힘든 것일까? 아니면 둔감한 것일까?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하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을 막아달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지난 2016년 발간돼 100만 부에 육박하는 판매고를 올린 <82년생 김지영>은 최근까지도 페미니즘에 의한 페미니즘을 위한 소설이라는 논쟁을 낳고 있다.

30대 전업주부 김지영을 통해 이 시대를 대표하는 한국 여성들의 일상을 재현하면서 수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남성을 가해자로 묘사해 성 갈등을 조장한다며 불편한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한 여자 연예인은 이 소설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남성 팬들의 맹비난을 받았다. 그만큼 소설이 사회에 미치는 파장이 컸다. 국민청원을 올린 남성은 특정 성별과 사회적 위치에서 바라보는 왜곡된 사회에 대한 가치관이 보편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몇몇 사람이 겪은 이야기일 뿐이며 너무 극단적 예시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미투'운동의 시작점을 알린 인물은 서지현 검사였다. 그의 용기 있는 고백 덕분에 그동안 숨겨져 있던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의 억울함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그런데도 82년생 김지영의 이야기가 일부의 이야기일 뿐일까? 서지현 검사의 힘든 투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김지은 씨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비서로 있으면서 여성으로 수치스러운 일을 겪었다. 그런데 결과는 안희정의 무죄였다. 성적자기결정권이 있는 여성이었기에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 사회에서 피해자인 여성은 여전히 힘없는 존재임을 여실히 깨닫게 해 준 결과였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얼마나 공감하는가? 너무 쉽게 이들을 응원했다가 쉽게 잊고 있는 건 아닐까? 82년생 김지영의 이야기가 사회 곳곳에서 일어났었고, 여전히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그 고통이 일부의 이야기이며 극단적 예시라는 건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고픈 자기중심적 사고와 해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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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온전한 소통보다 조금이라도 약자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공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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