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적 목적으로 탄생한 기단, 그 높이에 담긴 비밀
목조건물 습기 차단 위해 사용한 건물의 받침 '기단'
위계에 따라 높이 달라져 탑 층수 셀 때 기단부 빼야

이번 주부터는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할 계획이다. 조금 폼 나게 말해서 건축이다. 인간의 생활에 가장 필요한 아이템일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가 담긴 경우도 많고, 그 의미 자체가 특정한 역사적 맥락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왜 백제는 미륵사를 만들고 신라는 황룡사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르네상스시대 피렌체 두오모(Duomo di Firenze)는 왜 그렇게 높이 솟아야만 했을까?

만약 필자가 유럽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면 벽돌로 만든 건물의 역사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삶의 공간을 만든 게 벽돌이다 보니 덴마크에서는 벽돌을 닮은 완구인 레고가 나올 수 있었고, 어도비(Adobe)라는 소프트웨어 회사에서는 포토샵이나 PDF 파일 포맷을 만들었다. 어도비는 메소포타미아지방에서 만든 벽돌 이름이다. 벽돌로 세상을 만들 듯이 자기네 회사의 소프트웨어로 세상을 만들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동북아시아 건축의 주된 재료는 목재이다. 벽돌건축과 관련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앞으로 나무를 가지고 만든 건축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짚어보겠다.

◇동아시아 건축재료 '목재'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들은 당연히 살 집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주 이른 시기 사람들은 별다른 도구가 없어 특별한 시설을 만들지도 못했고 기본적으로 여기저기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다 보니 간단히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동굴 같은 자연 시설을 찾아 몸을 숨기는 정도의 생활을 했을 것이다. 상당한 내구성을 갖는 생활시설은 사람들이 한 곳에서 오래 머물게 되면서 등장했다. 정말 이른 시기 집들은 아마 그리 굵지 않은 나무를 가운데 하나 세우고 그 주변을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나무나, 사냥한 짐승의 가죽 등으로 둘러서 겉을 만든 우산 같은 모습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집이 처음 만들어진 신석기시대 집자리들은 대부분 평면이 원형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의 집은 구조상 큰 단점이 있다. 중심이 되는 기둥이 하나여서 구조물 전체의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다. 우산을 땅에 세운다고 생각해 보자 얼마나 안정적으로 땅 위에 서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초기에는 가운데 기둥과 벽쪽 구조물을 땅에 박아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를 통해 구조물을 세울 수는 있었지만 다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습기는 나무를 쉽게 썩게 만들고 지상보다는 지하가 더 습기를 많이 품고 있는데 건물의 중심이 이런 습기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지붕이 건물 중심에서 급격하게 땅으로 이어지다 보니 사람들이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한 집안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도 늘어가게 되면서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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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순 쌍봉사 대웅전. 화재로 소실되기 전 모습(좌)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21호). 가장 세련되게 완성된 신라식 삼층석탑.

◇기단을 만든 배경

가장 기본적인 방안은 집 가장자리를 따라 땅에 박힌 부분을 들어 올려 높이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선 집 벽면을 따라 우리가 생각하는 기둥이 등장해야 한다. 그러면 과연 몇 개의 기둥이 가장 합리적일까? 일단 하나가 문제여서 생긴 문제이니 최소한 두 개부터 시작이다. 하지만 역시 두 개는 중심을 잡기도 공간을 만들기도 어렵다. 세 개가 되어서야 중심도 잡고 어느 정도 내부 공간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평면이 삼각형으로 된 건물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삼각형 건물에 기둥을 하나 추가해보면 알 수 있다. 쓸 수 있는 면적이 두 배로 늘어난다. 젊은 세대들이 즐겨 쓰는 말로 '개이득'인 상황이다. 어른들의 용어로 말하면 내 자산의 33%를 투자했더니 총자산이 200%가 된 상황이다. 여러분들이라면 어떻게 하시겠는가? 그래서 지구상에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물 평면으로 사각형을 선택했고 그 결과가 지금 우리의 인식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선사시대에는 이런 건물을 만들기 어려웠다. 이런 건물은 필수적으로 지붕과 기둥을 잇는 또 다른 시설들이 필요하다. 이런 시설들을 받치고 있는 기둥을 맨땅에 박으면 과연 그 땅은 기둥을 충분히 받칠 수 있을까? 땅 속으로 꺼져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땅에서 받는 습기의 영향도 줄이고 튼튼하게 무거운 구조물을 받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물에 썩지 않고 단단한 추춧돌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주춧돌은 기둥보다 땅에 닿는 면적이 넓어 건물의 하중을 분산시키는 역할도 했다. 하지만 주춧돌 하나로는 나무기둥에 가해지는 습기를 완전히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빗물이 직접 들이치거나, 땅에 맞은 다음에 튀어나온 물들을 막기 위해서는 아주 큰 주춧돌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돌이라고 쉽게 찾아지는 것도 아니고 찾았다 해도 다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 이 또한 만만한 일은 아니다. 또 건물이 커져갈수록 복잡하고 무거워져가는 상부 구조물의 무게를 주춧돌만으로 감당하기는 벅차기만 했다. 그래서 삼국시대쯤에는 건물 전체를 단단하게 다지는 기초공사를 하고 모든 건물을 통째로 들어올렸다. 기초를 튼튼히 다지면서 받침대를 만들고 그 단 위에 주춧돌을 놓은 다음, 그 위에 건물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설물을 기단이라고 부른다. 건물의 받침이라는 뜻이다. 지금 남아 있는 대부분의 목조건물은 다 기단 위에 올라서 있다.

이렇게 실용적인 목적으로 생겨난 기단은 건물의 위계를 나타내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조금 보수적인 경북 안동지방 양반가의 건물들은 기단을 상대적으로 높게 만든다. 하인들이 주인의 얼굴을 보는 게 아니라 발끝을 보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또 하나는 아예 기단을 두 겹으로 만들기도 했다. 경복궁 근정전이나 왕의 집무실인 사정전 등은 기단에 월대라고 부르는 시설이 하나 더 있다. 이중기단이라고 한다. 이걸 건물의 위계와 연결시켜 말한 이유는 엄격하게 황제국과 제후국의 구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후국은 두 개의 기단, 황제국은 세 개의 기단을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경복궁 근정전은 이중기단 위에 올라 있고, 자금성 태화전은 삼중기단 위에 놓여 있다.

◇석탑의 층수는?

기단과 관련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답사를 다닐 때 항상 듣는 질문 중 하나를 공유해보고자 한다. 석탑이야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석탑의 층수를 세는 데 혼란스러워한다. 도대체 왜 이게 삼층석탑이냐는 것이다. 기초를 쌓았으니 차근차근 짚어보자.

우리나라 불교 초기에는 절 가운데 탑이 있었다. 탑이 예배의 중심이 된 것은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 당시 탑은 나무로 만들었다. 그래서 신라 제일의 절 황룡사에는 9층 목탑이 있었고, 미륵사의 중심에도 큰 목탑이 서 있었던 것이다. 이 목탑이 석탑으로 바뀐 것은 불교 주된 예배 대상이 탑에서 불상과 전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당시 목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비록 1984년 화재로 인해 소실된 후 다시 만들었지만 화순 쌍봉사 대웅전(사진 1)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기단이 있고 그 위로 지붕 세 개가 올라가 삼층을 이루고 있다. 이런 모습을 돌로 표현한 것이 지금의 석탑이고, 이 과정에서 탑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을 고려하여 기단을 하나 더 만들었다. 이렇게 완성된 석탑이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보게 되는 신라계열 이중기단 삼층석탑이다(사진 2). 이 과정에서 탑이 위로 쭉 뻗어 올라가는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두 번째 기단을 좀 높고 크게 만들다 보니 일반인들은 지붕돌인지 기단인지 구분하기 힘들게 된 것이다. 통상적으로 아래쪽에서 두 단은 건물을 받치는 기단이니 그걸 빼고 층수를 세면 대부분 맞다.

하지만 아주 예외적으로 몇몇 석탑들은 단층기단 위에 올라가 있기도 하다. 경주 남산에 있는 용장사곡 삼층석탑을 보자. 분명히 가장 아래쪽 얇고 넓은 기단이 생략되어 있다. 이런 양상을 호사가들은 이렇게 해석하기도 한다. "용장사탑은 경주 남산을 1층 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두 번째 기단을 올려서 만든 석탑이다. 탑이 있는 지점의 해발고도가 330m를 넘으니 용장사탑은 거기에 탑의 높이 4m를 더해 전체 340m에 육박하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석탑이다." 참고로 63빌딩의 높이는 274m이다. 이런 단층기단 석탑은 탑 높이만큼이나 큰 공덕을 성취하고 싶은 신라인의 기상일 수도 있고 후대 도선으로 대표되는 산천비보 사상을 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훗날 김시습은 이곳에서 금오신화를 지었다.

/글·사진 최형균(LH 총무고객처) talktalk@lh.or.kr

※ 이 기획은 LH 한국토지주택공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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