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잘되면 된다는 고약한 심보
더불어 사는 공존의 삶 고민할 때

속내를 훤히 드러낸 채 서 있는 갈잎나무를 보면 멀리서 봐도 눈에 들어오는 게 있다. 나무 꼭대기에 둥그렇게 뭉쳐진 모양. 바로 새집 같은 '겨우살이'이다.

겨우살이는 사철 푸른 상록수로 겨울에도 죽지 않는다고 해서 옛사람들은 불로장생의 효능을 지닌 신통한 식물이라고 믿었고, 서양 사람들조차 불사신의 상징물로 삼았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겨울에도 푸르러 동청(冬靑)이라고도 불리는 이 식물은 항암작용, 고혈압, 관절염, 신경통, 지혈, 이뇨, 당뇨병 예방 등의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겨우살이로 담근 술은 기동주(奇童酒)라 부르며 귀하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이 녀석이 삶을 유지하는 행태를 보면 참 얄미운 식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로 참나무, 떡갈나무 같은 활엽수 가지에 빌붙어서 그 나무를 숙주로 삼아 물과 영양분을 가로채 착복하기 때문이다.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물을 끌어 올리고 애를 쓰는 나무에 흙 하나 묻히지 않고 떡하니 올라앉아서 양분을 야금야금 가로채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하필이면 그 여리고 연약한 나뭇가지에 들러붙어서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고통을 주고 있으니 겨우살이를 달고 있는 나무는 얼마나 괴로울까. 생각할수록 잔밉다. 그가 나뭇가지에 기생하는 것은 세찬 비바람에도 절대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생존전략이라고 하니 더욱 가관이다. 풀잎이 바람에 꺾이지 않듯 부드럽게 휘어지고 늘어지는 그 탄성을 이용할 줄 안다는 것이다.

겨우살이가 나뭇가지에 싹을 틔울 정도면 5년 넘게 기생한 것이고, 이미 줄기 깊숙이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생존의 터전을 완전히 잡은 것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겨우살이가 기생하는 나무는 성장 속도가 느려지고, 수명도 짧아 목재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 못한 한 식물학자가 겨우살이가 기생하고 있는 나뭇가지와 줄기를 잘라서 겨우살이에게 가는 양분을 차단하였더니 숙주나무와 겨우살이가 함께 말라 죽더라고 했다.

내가 받을 수 없게 되면 도움을 준 상대방을 죽이기까지 하는 흉측스럽고 역겨운 녀석이다. 남이야 어찌 되든 말든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사악한 심보가 어째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얼룩진 우리 사회의 단면과도 같아 씁쓸하다.

나 역시도 내가 가진 편견이나 선입감 때문에 사람들을 함부로 편애하고 상처를 준 일이 적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활엽수와 같은 숙주가 되어주지는 못할망정, 이기적인 겨우살이 같은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나 자신을 성찰해보지만 막막한 숙제만 더할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네가 잘살아야 나도 산다'는 게 '공존 법칙'의 기본 개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공존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날로 치열해지는 경쟁 구도 속에서 가진 것에 자족하기보다는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이 끊임없이 폭력을 불러온다. 사사건건 갈등과 대립으로 민심은 이리 찢기고 저리 찢겨버렸고, 이웃에 대한 손길과 시선마저 차가운 날씨만큼이나 싸늘해졌다. 이웃 간 나눔의 정서와 공존의식은 물론이고,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규범 등 우리 사회규범의 복원이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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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공존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행복한 공존을 지향한다. 행복한 공존만큼 중요한 사회적인 가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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