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가로수길 나무 은하수 전구로 치장
상대에 대한 예의·존중 먼저 생각할 때

며칠 전 성산아트홀에서 공연을 보고 우연히 '도민의 집'이 있는 가로수 길을 차를 타고 지나왔는데 눈이 부실 정도로 별천지였습니다.

그러나 황홀함에 사로잡혀 그 짧은 거리를 오래 지나왔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습니다. 길 양편 쭉쭉 뻗은 나무에 은하수 전구로 화려한 옷을 입혀 놓았기 때문입니다.

주변 상가들의 불빛도 눈부실 정도로 밝은데 꼭 나무에도 불옷을 입혀야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간접 조명으로 은은하게 하든지 아니면 침침하게 내버려 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일었습니다.

은하수 전구에서 얼마나 많은 열이 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 그 열을 최소화했겠지요. 불이 날 정도는 아니더라도 전기가 흐르면 열이 나기 마련일 텐데 그 열이 나무들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요?

사람들이야 한순간 즐거우면 그만이지만 나무는 그 작은 열이 엄청난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즘 낮과 밤이 바뀐 사람들이 많아 무심할지 몰라도 밤이면 나무들도 잠을 자야 하는 것 아닙니까?

너무 예민하다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무들에 반짝이 옷을 입히는 이 계절이 편하지 않습니다. 올해도 수많은 나무가 불옷의 스트레스를 견뎌야 할 텐데 나무들이 말이 없으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별문제가 없었으니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라도 나무에게 밤에도 대낮같이 불을 밝히고, 그들의 몸에 전선을 사슬처럼 감아도 되는지 물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이 답을 이미 잘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셀 실버스타인의 동화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나무의 헌신과 희생은 무한하고, 나무 없는 삶이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권리로 이렇게 오만방자한지 몰라도 지배와 파괴가 아니라 더불어 상생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나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도 지켜야 합니다. 예의의 기본이 상대를 높이고 존중하는 것이라면 우선 나무들을 더 자세히 그리고 더 오래 들여다볼 수 있어야 나무들도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신약성서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2살 이하의 아이들이 살육당하는 이야기도 나옵니다(마2:16-18).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이 아이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이 기쁜 날인 동시에 슬픈 날이기는 하지만 성탄이 모두에게 기쁜 날이 되어야 성탄이지 않을까요? 우리가 나무들에 불옷을 입혀야 성탄과 연말이 즐거워질지 몰라도 나무들에게 슬픈 성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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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나만의 성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성탄에는 나무뿐 아니라 우리 주변의 작은 아픔과 슬픔에도 민감해져서 모두의 성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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