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요이 문화 한반도 남강유역서 전파
한·일 문화교류로 당시 길 복원했으면

1884년, 현재 동경대학 구내인 야요이라는 작은 마을의 패총에서 색다른 토기, 즉, '야요이식 토기'가 발견되자 이것이 사용된 시기를 '야요이 시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후 이 토기가 한반도에서 쌀농사 기술체계와 함께 도래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야요이 시대는 일본이 원시시대를 벗어나 농경중심의 새로운 문명이 시작된 혁신의 시대이며, 고대국가 형성의 토대가 마련된 중요한 시대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야요이 시대를 이끈 주역인 도래인의 고향을 찾는 연구가 활발하다. 그중에서 도쿠시마 대학의 하시노(端野晋平) 교수는 한반도 남부에서 수도작 농경기술을 가진 도래인이 왜 발생했는지 그 요인을 연구하면서 그들이 함께 가지고 온 복합적인 문화요소에 주목하여 그 수수께끼를 풀고 있다.

먼저, 야요이 문화가 시작된 규슈지방의 '주거형태'를 살펴보면, 집터의 바닥 면은 주로 직사각형 혹은 원형으로 터를 파내고, 그 중앙에 타원형으로 다시 낮게 파인 작업 공간(pit)을 두었다. 또 이 피트의 양쪽 끝의 밖에 두 개의 기둥 흔적은 있으나 그 외 다른 기둥은 없었다. 이런 주거방식(二柱穴(外)·方形/圓形·無柱)은 한반도 남부에서 남강유역 대평리식 주거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송곡리형 주거가 약간 변형된 형태다. 따라서 야요이 시대 시작과 함께 규슈지방에 나타난 주거형태의 뿌리를 남강유역의 대평리와 김해 등 경남지역으로 보고 있다.

또, 볏과 식물의 이삭을 추수하는 데 주로 쓰인 석도는 농경의 기원이나 전파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다. 석도는 그 모양에 따라 반월형과 삼각형, 또, 칼날(刃) 가공에 따라 편인(片刃)과 양인(兩刃), 구멍(孔) 숫자에 따라 일공과 이공으로 구분한다.

규슈지방의 석도는 대략 세 종류로 분류되는데, '반월형 편인 이공'은 한반도 남부의 거의 모든 지역에 분포하지만, '반월형 양인 이공'은 남강유역과 울산지역에서만, 또, '반월형 양인 찰절(갈아서 구멍을 냄)'은 남강유역에서만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일본에서 수도작 농경 개시와 동시에 단도마연토기가 나타남으로써 토기양식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특히 그는 토기 목 부분(頸部)의 연마방법에 주목하여 한반도 남부의 남강유역과 고성-김해지역의 단도마연토기가 규슈지방으로 전파된 것으로 분석했다.

끝으로, 묘제인 지석묘는 그 보수적인 성격상 도래인의 고향과 그들의 도착지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이다. 한반도에서 지석묘의 밀집도로 보아 서남부가 주목받았지만, 지석묘의 형식과 상석(上石)의 규모·형태, 부장품의 내용 등을 종합해 보면 규슈지방의 지석묘의 기원지는 남강유역이며, 최근의 연구결과, 낙동강 하구의 김해 율하리도 이에 포함될 것으로 보았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청동기시대 한반도 남부의 수도작 농경문화는 진주 대평리를 중심으로 남강문화를 공유했던 경남지역의 선인들에 의해, 야요이 시대의 4대 물질문화인 주거지, 석도, 단도마연토기, 지석묘를 포함한 다양한 문화요소와 함께 대한해협의 쓰시마·이키노시마를 거쳐서 규슈지방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루트가 당시 대평인들이 만든 '야요이 문화 창조 로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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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이후 조선통신사에 이르기까지 한·일간 문화교류의 역사는 매우 깊다. 그러나 조선 말기 쇄국정책으로 산업근대화의 기회를 놓침으로써 그 문화적 주도권은 아쉽게도 역전되고 말았다. 청동기시대 대평인들이 만든 '야요이 문화 창조 로드'를 복원하자. 그리고 그들을 문명화시킨 후예답게 21세기 새로운 남강문화를 꽃피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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