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6개월간 기계적이고 어색했던 동거
이름 부르고 의미 부여하자 인식 달라져

필자는 햄스터를 키우고 있다. 아이들이 키우다가 서울에 가면서 가져가기 어려워지자 필자가 그대로 떠안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동물을 집 안에서 키워본 적도 없고 또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터라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떠안은 이 햄스터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햄스터 사는 것을 반대했는데 결국 뒤처리는 내가 해야 하나 한숨만 나왔다. 종량제 봉투에 넣어 버려 버릴까 아니면 풀숲에 놓아줄까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다. 하지만 살아있는 생명을 어떻게 한다는 게 우선 마음에 걸렸고, 아이들이 정을 주고 키웠던 것들이라 그냥 두기로 했다. 냄새야 조금 힘들겠지만 적응하면 될 테고, 먹이도 하루에 한 번씩만 주면 되고, 케이지 안의 톱밥 갈아주는 것도 가끔 내려오는 아내의 도움을 받으면 될 일이니….

이렇게 떠안은 햄스터와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냄새가 힘들었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고 돌아올 때까지 아무도 환기를 시켜주는 사람이 없으니 집안에 햄스터 배설물 냄새가 떠돌았다. 냄새 때문에 베란다에 내놓고 키우려고 했는데 여름에는 직사광선, 겨울에는 추위 때문에 햄스터가 죽을 수 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

퇴근하면 바로 환기하고 햄스터 먹이를 주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거의 기계적이었다. 햄스터를 손에 올리거나 눈을 마주치고 놀거나 하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새벽에 곤히 자는데 햄스터가 케이지를 가는 소리가 들리고 단잠을 깨고 만다. "아이고, 정말!"이란 소리가 절로 나오곤 했다. 귀마개를 끼기도 하고 햄스터 케이지를 이리저리 옮기기도 해봤다. 그렇게 햄스터와의 동거는 필자에게 불편함과 짜증만 유발했다. 그래도 살아있는 생명이라 자연사할 때까지는 안고 가야지, 주인으로서 의무는 다해야지 그런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퇴근하고 들어오면 마치 필자를 반기듯이 햄스터가 케이지 집에서 나와 멀뚱멀뚱 필자를 쳐다보거나 쳇바퀴를 돌리기 시작했다.

아니 처음부터 햄스터는 그리했을 터다. 하지만 그동안 햄스터의 행동에 아무런 의미부여를 하지 않은 필자에게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햄스터와 눈을 맞추고, 손에 올려 먹이를 주고, 그 작은 몸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주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햄스터를 키운 지 수개월 딸아이가 지어준 이름도 몰랐는데 이름도 정확히 알게 되었다. 모카였다.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하는 직업 속성상 밤늦게까지 술을 먹는 날이 많은데 일행들에게 햄스터 밥 줘야 한다면서 먼저 일어나기도 했다. 그렇게 술을 잔뜩 먹고 들어오는 날이면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모카야. 아빠 왔다" 하면서 케이지로 다가가 햄스터를 손에 올렸다. 참 신기했다. 나처럼 감성이 메마른 사람도 혼자 사는 외로움에 이런 작은 생물에게 정을 줄 수도 있구나 싶었다.

필자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참 좋아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햄스터와 필자는 같은 시공간에 있었지만, 필자에게 햄스터는 물리적으로만 인식될 뿐 전혀 다른 의미부여가 되지 않은 사물이었다. 하지만 이제 필자는 햄스터, 모카의 수명을 걱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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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스터는 종마다 다르지만 보통 2년을 넘기지 못한다고 한다. 모카가 죽으면 슬프려나, 어디 양지바른 곳에 묻어줘야겠지, 새 햄스터를 사서 키울까. 아내와 아이들을 보러 서울에 왔다가 창원 집에서 혼자 쳇바퀴를 돌리고 있을 모카 생각에 주저리주저리 글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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