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문화부 기자들이 만든 소소한 동네 문화지도
변하지 않은 신념 그 흔적 더듬으며
고려동 유적지·조순장군비
고려 말 문무인 충절 또렷
곳곳서 생육신 절개도 새겨

함안은 남쪽에 높은 산이, 북쪽에 남강이 있어 물이 북으로 흐릅니다. 임금을 향해 역수하는 물은 역모의 상징이죠. 물론 함안에서 역모가 일어난 적은 없습니다. 함안 사람들은 남쪽 산에다 '여항(뛰어넘음)'이란 이름을 붙이면서까지 이 오명을 벗으려 했습니다. 오명의 원인은 또 있습니다. 함안에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쉽게 타협하지 않던, 고집 센 선비들이 많았거든요. 이들의 빛나는 고집이 함안을 강직한 선비의 고장으로 만들었을 테지요. 이번에는 함안의 높은 선비 정신을 찾아 돌아다녀봤습니다.

◇고려동 유적지

고려 후기 성균관 진사 이오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서자 현 산인면에 거처를 정하고 충절을 몸소 실천했다. 이오 후손은 조선의 벼슬을 맡지 말고, 자신의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라 했던 이오 선생 유언에 따라 600여 년 동안 굳건히 자리를 보전했다. 대부분 건물은 한국전쟁 때 모습을 잃어 복원했으나, 아늑한 정취는 그대로다.

▲ 고려동유적지. 고려 성균관 진사 모은 이오의 뜻을 따라 후손들도 벼슬보다는 자녀 교육과 학문에 전념하는 가풍을 이어온 곳이다. /이서후 기자

◇조순장군비

"번국으로서 상국을 범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하나 왕명을 받들지 않고 급히 회군함은 더욱 불가하다." 고려 후기 이성계와 위화도까지 출전했던 조순 장군은 회군에 반대했고, 급기야 벼슬을 버리고 검암에 은신했다.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조순을 찾아 수차례 복직을 권했으나 그는 끝내 사양했다. 현재 하마비는 현대식 건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왕명을 거역하면 목을 베겠다는 엄포에도 굽히지 않은 지조만은 역사에 오롯이 남았다.

▲ 조순장군비. 조선이 건국되자 낙향해 지낸 조순 장군의 지조를 기리며 세운 하마비. /이서후 기자

◇어계고택

조선 세조가 단종에게서 왕위를 뺏자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섯 사람을 '생육신'이라 부른다. 어계고택은 생육신 한 명인 어계 조려 선생이 지냈던 곳. 그는 이곳에서 학문에 정진하며 남은 생을 보냈다. 대문채를 지나 원북재 뒤로 가면 사당이 있는데, 음력 3월 초정일에 조려 선생과 그 부인 향례를 지낸다.

▲ 어계고택. 조선시대 단종을 위해 수절한 생육신의 한 사람인 어계 조려 선생이 지내던 곳이다. /이서후 기자

◇서산서원

한 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절의를 지킨 여섯 명. 경은 이맹전, 어계 조려, 관란 원호, 매월당 김시습, 문두 성담수, 추강 남효온을 기리고 배향하는 곳이 서산서원이다. 1703년(숙종 29년)에 세운 서원은 1871년(고종 8년) 대원군 서원 철폐령에 따라 한 차례 철거했다. 지금 자리로 옮긴 때는 지난 1984년. 매년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 국천제를 지내는 서원 입구에 놓인 방명록을 보면, 여전히 그의 후손 등이 오간 흔적이 또렷하다.

◇채미정

서산서원만으로는 조려 선생을 다 추모하지 못한다 여겨 지은 정자. 채미정에는 조려 선생 '구일등고시'가 백이·숙제 '채미가'에 견줄 만하다는 뜻이 담겼다. 채미정 뒤로는 큰 산을 축소한 듯한 모양새의 언덕이 있다. 청풍대라 부르는데, 비교적 낮은 언덕임에도 이곳에 오르면 주변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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