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시방 지분 가진 직원들의 화재 대처
계약직 선장에겐 없던 '주인의식' 빛나

내가 그 뉴스를 보고도 아무 감흥 없이 그냥 지나쳤던 것은 직접 관련이 없어서였다. 목숨을 잃은 사람 없이 모두가 불이 난 피시방을 잘 빠져나왔다니 천만다행이라고 여겼던 것이 전부였다.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달라졌다. 그 피시방은 함께 명상수련을 하는 내 후배의 동생이 운영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가벼운 경직이 왔다.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택시도 타 가며 여러 시간 걸리는 곳엘 갔다.

수원역 앞이었다. 가면서 스마트폰으로 뉴스들을 훑어봤다. 대응을 잘하여 인명피해가 없다는 평가들이었지만 생각보다 큰 화재였다. 내가 밥을 사겠다고 미리 얘기했다. 침착하고도 민첩하게 대응했던 직원들도 데리고 나오라고 했다. 격려하고 밥 한 끼 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역할로 여겨졌다. 지하 1·2층으로 된 화재현장은 참혹했다. 바닥에는 소방차가 뿌려댔던 소방수가 질퍽했고 타다 만 대형 의자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전날 최고 사양으로 업그레이드한 피시와 함께 녹아내린 모니터. 무너진 천장. 코를 찌르는 매캐한 화학제품 냄새. 이런 곳에서 250명의 손님을 지상으로 잘 안내했다는 직원들이 새삼 대견해 보였다.

여럿이 식사를 했는데 그 동생만 밥을 못 먹었다. 밥그릇과 국그릇을 헤집다가 숟가락을 놓았다. 사고가 난 뒤 바로 위경련이 와서 설사를 계속한다고 했다. 명치끝이 오그라든다면서 가슴을 펴지 못했다. 좌불안석이었다. 손도 떨렸고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손해사정인을 선임했다. 같이 만났다. 피해를 본 손님들로부터 항의와 질책이 이어졌다. 페이스북으로, 카톡으로, 전화로. 특히 수원지역 언론사들의 상식을 벗어난 다그침도 있었다. 질식한 한 여학생은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있었다.

그래도 이만하기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직원을 안아줬다. "고맙다"고 했더니 쑥스러워했다. 다시 "자네 안 다쳐서 고마워"라고 말했다. 이 말뜻을 알아챘을까? "아니에요. 사장님이 평소에 해 주신 거 비하면 아니에요"라고 했다.

이때 머리가 번쩍했다. 그렇다. 다섯 명의 직원이 일사불란하게 피시방 손님들을 잘 대피시킨 것이 이들의 성품이나 인격 문제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짐작이 맞았다. 이 피시방 직원들은 사장의 평소 배려를 잘 알고 있었다. 어려운 직원에 대한 보살핌도 많았다고 한다. 지분을 직원에게 배분해서 높은 배당률을 줬다고 한다. 곁에서 들은 얘기다. 그때의 직원들이 키보드 하나라도 건져보겠다며 그을음을 닦고 있다고 한다.

1년짜리 계약직이었던 세월호 선장이 떠올랐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세월호의 항해사·기관장·기관사의 급여는 170만 원에서 200만 원 수준으로 선박직 15명 중 9명이 계약직이었다고 했다. 3개월에서 6개월짜리 계약직들은 문제가 발견되면 고치기보다 더 좋은 일자리 찾아 떠날 마음이 앞섰을 것이다. 피시방과 손님들을 살리려고 최선을 다한 직원들의 헌신이 이해가 되었다. 경기도에서 주려는 포상을 사양하였다고 들었다. 다친 사람들이 있는데 상을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고 한다.

불의의 사고가 나면 원망과 자책, 꼬리를 무는 새로운 걱정들. 그것이 화재건 물난리건 도둑이건 사고를 당하면 그 사고로 인한 2차 고통이 따른다. 이른바 심리적 고통이다. 안부가 궁금하여 후배의 동생에게 방금 전화를 걸었다. 동생은 숨이 넘어가게 빼꼭한 일과를 나열했는데 모두 다 누군가를 위한 일과였다.

전희식.jpg

상처를 딛고 흉터 없이 회복되길 빈다. 피해자와 피시방 주인인 후배 동생과 관계자 모두.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