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후 거제서 민간인 학살 자행
억울한 죽음 풀려면 진상 규명 절실

차가운 날씨다. 바람이 세차다. 여느 때와는 달리 바람의 강도가 다르다. 바닷바람은 더하다. 아침을 한참 지난 시간임에도 그 바람은 그치지 않는다. 얼굴에서부터 손끝까지 차가움이 밀려든다. 그래도 바람에 휘둘리지 않고 뚜벅뚜벅 걸었다. "이 바람쯤이야" 하고 생각했다. 여유로운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며칠 전 거제 바람의 언덕에서도 바람을 맞이했다. 웅웅 소리를 냈다. 풀들이 바람에 못 이겨 눕는 모습을 보였다. 옷깃도 심하게 흔들렸다. 마을의 작은 길을 따라 '별 그대 동백나무 숲길'과 세상에서 제일 작은 '순례자의 교회'를 지날 때까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바람이었다.

바람이 '바람의 언덕'으로 안내를 한 것은 우연이 아닌 듯싶다. 거제 민간인학살추모공원 추진위원회 설립 20주년을 즈음하여 진행된 명상 걷기의 꼭짓점인 '바람의 언덕'에서 웅성거리는 바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6·25전쟁을 전후해 이념 갈등으로 거제에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의 작은 외침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죽임과 죽음은 또 다른 차원의 세계이다. 죽음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라면 죽임은 누군가의 의도적 행위에 의해 죽게 될 때를 말한다.

부지불식간의 죽임을 당하면 강한 착이 있기 마련이다. 원착(怨着)이다. 원망하고 미워하고 한탄하는 착이다. 원착이 있으면 진급의 길에 들어서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원착을 여의지 못하면 참 열반을 얻지 못하는 이유다.

영혼들을 위해 바람의 언덕 한쪽에서 두 손을 모았다. "큰 원을 세우고 착없이 길을 떠나십시오"라고 염원했다. 입대원력 막착이거(立大願力 莫着而去)다. 이어서 "청정 일념을 챙겨 새 몸을 받으십시오"라고 기원했다. 그제야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이 마음속에는 큰 서원과 포부를 다 펴지 못하고 중도에 생을 달리했지만, 차츰 진급기에 들기를 바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다행스럽게도 거제유족회 주최로 합동위령제를 올리는 것 역시 착심을 여의고 좋은 곳으로 태어나기를 축원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종교인들과 행사 관계자들은 명상 걷기를 끝내고 해금강 테마 박물관에 들렀다. 유경미술관 3-5관에는 가려진 민족적 비극인 제주 4·3사건, 여수·순천 사건, 거제 민간인 학살 사건 등 관련 자료들이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거제 민간인 학살에 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이 같은 거제 민간인 학살 사건은 1960년 국회 특위 조사활동을 비롯해 학계 연구,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활동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고 볼 수 있다.

시간 관계상 오후에 진행된 추모식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러자 또 한차례 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거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재조명되기를 촉구하는 바람이라고 보았다. 그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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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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